얼마 전 가톨릭신문에 연재된 이병갑씨의「은총은 사선을 뚫고」를 읽고 감회가 깊었다. 나이는 내가 어렸지만 같은 피난민으로서 그때 부산의 중앙성당에서 서로 얼굴도 모르는 채 지났지만 36년이 지난 지금 지상에서나마 그 당시의 추억을 같이 더듬게 된 것이다. 그것도 같은 직업에 종사하는 처지가 되어서.
어렸을 때의 추억을 생각해보니 고생하던 그 시절이 오히려 지금은 아름답게 느껴지고 그립기조차하다.
내가 성당을 잠시나마 거처로 삼고 지내게 된 것은 부산에서뿐만 아니고 월남했을 때부터였다. 신의주본당 신자였던 우리 가족은 서울에 와서도 아는 사람이 없이 처음 찾아간 곳이 명동성당이었고 그곳에서 겨우 자리를 잡고 독립해 나오자 6ㆍ25가 발발했고 그래서 1ㆍ4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 오면서 찾아간 곳이 역시 중앙성당이었다. 그야말로「주께선 나의 피난처」주님의 거처가 우리의 거처가 되었던 것이다.
벌써 이곳도 피난민 신자로 만원을 이루었고 원산교구는 제의방 평양교구는 제대를 향하여 왼쪽 등등으로 구별하여 각 교구별로 모여살고 있었는데 그때는「지은사」라는 절을 개조하여 성당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아주 좁았다. 성당 안에 사는 사람들은 짐을 여러 줄로 나누어 쌓아놓고 그 사이에서 식사도하고 기거하였는데 코고는 사람이 제일 문제였다. 미사 시간이 되면 성당안의 짐들을 좌우벽으로 밀어붙이고 미사를 드렸고 끝나면 다시 제자리로 옮겨놓곤 하였는데 발 디딜틈 없는 제의방에서 복사본을 갈아입느라고 누워있는 사람의 발도 몇 번 밟았다. 미사 중에는 된장ㆍ김치냄새 등 반찬냄새가 역겨울 때가 많았으며 옷 갈아입을 때가 곤란하여 탈의실을 만들어 사용하였고 뭐니뭐니해도 제일 고충은 아침에 수백세대가 공동으로 사용하는 화장실 문제였다. 그러나 이런 딱한 처지의 피난민들을 하느님께서는 잘 돌봐주셔서 모두 제각기 자립해서 살게 되었고 그때 피난민들의 보금자리였던 성전도 이제는 크고 아름답게 새로 지어진 것이다. 이병갑씨는 이국땅에서 많은 교포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계시다니 나도 오늘의 나를 있게해 주신 하느님과 나의 보금자리였던 우리 본당을 위한 조그마한 봉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임하여야겠다고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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