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를 나흘 앞둔 지금 나의 상념은 벌써 선거 이후로 달린다.
선거란 그 자체가 목적일 수 없고 다만 그 이후를 위한 수단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이번 선거를 『군부독재가 지배하는 어둡고 암담했던 과거로 돌아가느냐, 아니면 민주조국의 새벽을 여느냐의 갈림길』이라고 굳게 믿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다. 이런 나에게 12월 27일의 새벽이 어떻게 다가올 것인지, 그때의 내모습이 어떠할 것인지 아직은 단정지어 말할 수 없다. 혜안을 갖추지 못한 나로서는 이글이 독자들에게 전해질 즈음이면 이미 밝혀져 있겠지만, 국민 대다수가 선택한 어느 한쪽의 길에 들어서서 기쁨의 축배를 나누고 있거나, 아니면 통한의 눈물로 술잔을 적시고 있을 자신의 모습을 그저 상식의 눈으로 비쳐보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그 어느 쪽이든 석거란 어차피 편을 드는 일이요, 선택은 하나이며 승자는 둘일 수 없음을 깊이 체득하고 있을 것임엔 틀림없다. 나 자신부터 지난 16년동안 갈망했던 것이 바로 헌법에 의해서「편드는 권리」를 보장받고 선거를 통해서「편드는 자유」를 행사하는 일이며, 그래서 절정된 민의에 따르자고 외쳐왔던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승자의편에 서더라도 패자를 얕보지 않아야 하며 패자의 편에 서더라도 승자를 질시하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한다.
그러므로 나는 선거 이후 통한의 술잔을 들고 있을 나의 모습을 그려보는데에 망설일 필요가 없다. 선거란 뚜껑을 열어보아야 안다는 말이 있듯이 의외성의 게임이다. 선거를 통해 언제나 최상의 지도자가 선출된다는 보장은 없다. 개인적인 기대는 물론 국민 대다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후보가 당선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국민의 정치열이 높다고 해서 반드시 정치의식까지 성숙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고「김성식」교수는 『선거란 마치 비유컨대 밥을 지을 때 쌀을 까불고 고르고 씻고 이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쌀을 먹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못된 사람을 잘못 고르면 나라정치는 모래섞인 밥이 되고 만다는 뜻이다. 그러나 밥이야 버리면 되지만 선거는 그럴 수 없기에 보다 신중한 선택이 요구되는 것이다.
만약 국민의 다수가 금품에 매수되어 표를 팔거나 관권에 짓눌려 표를 빼앗기거나 지방색이라는 괴질에 걸려 표를 남용한다면 그 수준의 국민일 수 밖에 없다는 수모를 감수하면서 자신들이 차린 밥상을 일정 기간동안 마주 대할 수 밖에 없다. 아무도『나는 예외다』라고 말할 입을 지니지 못한다.「더불어 살아가야」할 이나라 국민과「더불어 깨우쳐가야」할 능력과 노력이 부족했던 것만으로도 그렇다.
이제 나는 기쁨의 축제도 나누어볼 용기를 지닌다.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다는 희망보다 더 큰 것은 없다. 그러나 민주화란 한 사람의 지도자에 의해서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칫 승리의 환호성에 파묻혀 역사를 망각하는 위험에 빠질 우려가 더 두려운 것이다.『해방이 되면서「친일파」의 소행을 잊었고, 5ㆍ16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이승만」정권의 독재를 잊었고, 박정희씨가 죽어가면서「유신」을 잊었던』이 나라 국민의 건망증 말이다. 나는 승자의 편에 서서 축배를 들게 되더라도 지난 6월의 민주대장정은 계속되고 있으며 거기에 이르기까지 치루어야 했던 백성들의 고통과 희생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소값이 개값되어 자살한 농민들의 원성과 저임금에 벌집신세인 근로자들의 한숨을 외면할 수 없다. 재개발에 쫓겨난 철거민들의 비탄과 민주화를 의친 탓으로 감옥에 갇힌 양심수들의 절규를 흘려버릴 수 없다.
뿐만아니다. 성고문에 유린당한 인숙이의 오열에 귀를 후벼파야 하고, 물고문에 숨져간 종철이의 비명에 뼈를 깍아야 한다.
최루탄에 쓰러진 한열이의 외마디에 살을 저며야하고, 동족의 총칼에 학살당한 망월동 영령들의 호곡에 피를 말려야한다.
승자가 축배에 취하여 백성의 한을 망각한다면 그 잔은 독배와 다름 없을 것이며, 패자 역시 회한의 잔에 바져 백성의 아우성을 외면한다면 그 술은 마약과 진배없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승자의 편에 서게 되더라도 자만을 경계할 것이며 패자의 편에 들게 되더라도 좌절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힘없고 방어수단이 없는 이들을 억압하는 정치적 야만과,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경제적 야만과, 반대자들이 침묵을 지키도록 협박하는 정신적 야만과 싸우는 데 진력할 것이다. 이 길만이 이번 선거의 승자가 다음 기회에도 승리를 다짐할 수 있으며 패자 또한 역전을 기약할 수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나는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선거 이후에 예상되는 또 하나의 모습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선거가 3ㆍ15 부정선거를 방불케하는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원천부정으로 얼룩져 민의를 조작하고 배신하는 결과를 빚어낼 경우에 초래될 저항과 혼란이다. 부당한 방법으로 얻어진 결과는 경쟁자들로부터 승복을 받을 수 없고, 그렇게해서 세워지는 정권은 국민으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나는 그 모습을 일단 접어두고자 한다. 그러한 조짐이나 휙책이 없어서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우려가 기우에 그치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을 차마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선거를 두고 미리 악순환의 되풀이를 상정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비참하다는 생각에서다. 다만 확실한 것은 끝내 부정이 자행된다면 나 자신 한점 주저없이 저항의 대열에서 있을 것이며 다수의 국민 또한 4ㆍ19의 역사적 교훈을 부정한 자들에게 가르쳐 줄 것이라는 사실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