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봄처럼 확 풀린 날씨에 메마르고 삭막했던 대지를 촉촉히 적셔주는 겨울비는 마치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처럼 다정다감해진다.
안개에 싸인 앞산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듯 참으로 오랜세월 잊고 있던 일들이 조용히 고개를 들며 다가온다.
여덟살 되던 해의 일이다. 그날도 오늘처럼 겨울비가 보슬보슬 내려 학교에서 돌아오는 내 옷깃이 흠뻑 젖어있었다. 그 당시 어머니는 병환으로 누워 계셨는데 비가 내리면 어머니는 십리나 되는 학교길을 꼭 사람을 시켜 나를 데릴러 오곤 했는데, 그날 따라 우산은 있었으나 나 혼자였기에 시무룩해져 있었다.
어머니는 벌써 눈치를 채셨는지 젖은 옷을 벗기고 새옷을 내주시더니 설에 신으라고, 아무리 졸라대도 주지않으시던 일본 유학중인 오빠가 선물로 사다준 목이 긴 털양말을 내주시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 좋아서 포근포근한 보기에도 따스한 그 털양말을 신고는 깡충깡충 뛰면서 밖으로 나가 친구를 기다렸다.
나는 오늘 보송보송하고 따스하던 그 털양말에서 어머니 품속 같은 포근한 정감을 느끼며, 고희를 넘긴 지금에도 겨울비가 내릴 때면 잊혀지지 않고 내 머리를 맴도는 아련한 기억에 젖어들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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