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손가락이 관여한 이야기가 세군데 있다. 첫째가 예수님의 손가락, 둘째는 하혈하는 어떤 여인의 것, 셋째가 저 유명한 토마의 손가락이다. 신ㆍ구약을 통해서 팔과 손에 대하여는 많은 기록이 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손의 그 기교와 능력,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자기표현 등 많은 것을 상징하고 있다. 예수님의 손 역시 하느님의 손처럼 전능하셔서 그 손에 모든 것이 맡겨져 있다고 요한이 전하고 또한 그 손은 잘 도와주신다고 마태오도 확언하고 있는 터이다. 우리의구원이 오로지 예수님의 손에 달렸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손의 핵심이 되며 의사교류의 초점이 되는 손가락에 대하여 많은 언급이 없음은 무슨 연고일까. 필자는 지금 손이나 팔보다 손가락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약 2년 전부터 중풍을 앓고 있는 나는 열손가락 중 그 반인 다섯 손가락이 마비돼 힘을 못 쓴다. 내 영혼의 말을 듣지 않는 무용지물이다. 성경에 보면 인간이 기쁠 때, 불한 할 때, 남을 축복하거나 혹은 어떤 일을 서약할 때 특히 기도할 때 영혼의 움직임은 손의 동작에 의해서 표현된다고 했다.
내 영혼의 움직임을 전달해 주지 못하는 이 다섯 손가락을 층은 하게 내려다보다가 흡연 제대 뒷벽에 달아놓은 큰 나무십자가를 쳐다보면, 큰 못으로 꿰뚫어놓은 예수님의 손이 중풍 초기의 마비된 손가락처럼 오그라져 있지 않은가. 뼈는 물론 신경을 다 끊어 놓았으니 저렇게 될 수밖엔. 복음을 전하시며 그 많은 병자들을 낫게 해 주시던 예수님의 손가락은 알맞은 굵기와 길이에 아름다웠으리라. 하느님 아들의 손가락이니깐. 손가락들이 한 일들을 성경에서 좀 더 소상하게 읽어보자.
요한복음 8장에 보며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간음한 여자를 그 현장에서 잡아다 군중들 앞에 세워놓고 그 처리방법을 예수님께 물었다. 모세의 율법을 내세워 예수님을 진퇴유곡에 몰아넣어 고발할 구실을 잡으려는 순간이다. 이때 예수께서는 몸을 굽히시고 손가락으로 땅 바닥에 무엇인가 쓰고 계셨다. 저 유명한『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치시오』라는 대답을 하시고 여전히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글을 쓰셨다. 한 폭의 그림 같은 극적인 장면이다. 나는 즐겨 이 장면을 읽는다. 이제 다 늙은 이 나이에『이 말씀을 듣자 그들은 나이 많은 사람으로부터 하나씩하나씩 사라져버렸다』는 대목에 다다르면 부끄러움을 감출 길 없어진다. 늙을수록 죄가 많다니… 예수님이 무슨 글을 쓰셨는지 알길 이 없다. 그러나 희고 긴, 그리고 끝이 뾰족하고 딴딴한 손가락으로 예수님은 그 영혼의 움직임을 이 지구상에 남겼을 것임에는 틀림이 없으리라.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가락 한 번 대고 병을 고친 어떤 여인의 이야기다. 상당히 유명했던 모양이다. 마테오도 마르꼬도 그리고 루까도 같은 사실을 전하고 있다. 그 여자가 갈릴레아호숫가에 살고 있었다는 것 외에는 일체 그 신분을 알 수 없다.
12년 동안 하혈하는 부인과 병을 앓느라고 병원마다 찾아다니며 가진 돈을 다 써 버렸다. 의료보험이 없던 때라 한번 불치지병에 걸리면 죽는 길밖엔 없었으리라. 병은 낫지 않은 채 이제는 돈도 없고 살길마저 막연하여 절망의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다. 예수라고 하는 분이 많은 환자를 무료로 고쳐 준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 여자도 이웃 사람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으며 내 병을 고칠 길은 그 분을 만나 부탁해 보는 길밖엔 없다고 마음에 굳게 다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분이 조그마한 배에서 내려 호숫가 이 마을에 오셨다 제자들은 말할 것 없고 수많은 군중들이 그의 뒤를 따른 것은 물론이다. 마침 야이로라는 이 지방 유력자가 자기아이 병을 고쳐달라고 청탁을 하느라 예수님의 길을 막아 멈춘 것이 바로 이 여자가 앉아있는 눈앞이었다. 강아지 모양으로 군중들 발치에 앉아있던 이 여자의 형편으로는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가락 끌을 살짝 대보는 길밖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지금 내 옷에 손가락을 댄 사람이 누구냐?』예수님이 물었을 때 제자들은 이 많은 군중들이 붐비는데 손이 좀 닿기로서니 누군지 알게 뭐냐고 웃었지만 예수님은 곧 알아보시고『부인, 당신의 믿음이 병을 낫게 했소. 잘 가시오』라고 하셨다. 그 병들고 가냘픈 손가락을 타고 예수님의 기적이 전달된 것이다.
몇 사람이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봤다고 한다. 확실히 죽었고 확실히 묻었는데 시체는 없어지고 살아났다니 무슨 소리냐. 토마사도는 화가 났다. 성질이 급했던 모양이다. 내 눈으로 보고 내 손가락을 그 상처에 넣어보지 않으면 믿지 않겠노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로부터 8일후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 토마는『내주시며, 내 천주 시로소이다』라고 항복을 했다. 이보다 더한 신앙고백이 또 있겠는가. 그러나 토마는 그 손가락 때문에 보지 않고 믿는 일급신앙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토마의 손가락은 짧고 굵었을 것 같다.
그런데 내 손가락은 어떠냐, 예수님의 손가락도 토마의 것도, 그렇다고 은혜를 받은 그 여자의 손가락도 닮은 것 같지 않다. 맥없이 오그라져 돌처럼 굳어있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손가락은 제2의 뇌』라고 했다. 인간의 뇌가 생각하고 전달하는 일들을 그렇게 정교하게 해내던 저손가락들이 이제 뇌가 졸중에 걸려 망가졌으니 오그라질 수밖에, 성경에 예수님이 안식일 날 골라 그 오그라든 손가락을 펴 주신 기적을 행하셨다. 주일날 미사 중에 혹시나 예수님이 나를 불러 『그 손가락들을 펴시오』하실지 모른다. 손가락 한 개만 이라도 예수님을 닮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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