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사제란 어떤 사람인가? 어떤 경우에 사제가 성공했다고 할 것인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사제가 되려면 어떤 준비를 해야 할 것인가? 한 번 소명을 받은 사제는 반드시 이러한 질문을 하게 된다.
나는 우선 좋은 사제가 되려면 신념(信念)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사제는 분명해야 한다.
그의 말은 폭풍우가 미치지 못할 만세 반석 위에 튼튼히 세워져야 한다. 그는 어두움이 가리우지 못할 빛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는 십자가 곁에 서서『이 하나만 안다』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사면팔방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이리저리 나부끼는 바람개비여서는 안 된다. 사제는 팥방미인이 아니다. 사도에게 주어진 진리에 대하여 무관심하거나 불확실한 태도를 가지면 그 결과는 파멸이다.
하느님의 초월성과 인간의 본성과 죄의 사실과 생의 구극 등에 대하여 단언할 수 없다는 과히 겸손한 태도를 취한다면 그것은 사제의 꼴이 아니다. 사제 된 자가 손가락으로 턱을 바치고 한 다리를 꼬고 벽을 기대 서서 하느님의 전능, 그리스도의 신성, 천국의 신비 등에 대하여 무슨 안 된 일이나 저지른 사람처럼 변명하고 사과하기에 급급해한다면 그 무슨 꼴이겠는가? 나는 어느 유명한 신학자와 대화를 하는 중에 우리 교회의 단점을 들어 말한 적이 있었다.『사제들의 자기의 메시지를 모르며 그들의 복음을 잃었다』고 하였다. 사실 교회에는 아무 특별한 것이 없다고 결론 내리는 사람이 적지 않다. 경건한 맘 좋은 사람들의 집단, 이런 일 저런 일을 위하여 사면팔방으로 분주히 돌아다니는 활동가들의「그룹」이라고 할까! 「교회가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려고」애쓰는 동안에「아무 사람에게도 아무 것도 안 되는」결과를 가져오지나 않는가. 두렵다. 참 신부는 베드로의 마감 훈계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너희 안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라』사도들은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지 않을 수 없다고 … 무엇에도 흔들릴 수 없는 확신을 가지고 전도하였다. 그러니만치 권위가 있었으며 힘차게 퍼져 나갔던 것이다. 확실한 자기 소신없이 그때그때의 형편에 맞추어 설교하려는 사제는 마치 평지에 구멍을 만들고 그 파낸 흙을 조처하기 위해서 또 다른 구멍을 파는 것과 같다. 첫 구멍에서 파낸 흙을 다음 구멍에는 밀어넣기는 했지만 다음 구멍을 파기 위해서 생겨난 흙이또 남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막연한 것은 그 끝이 공허하다. 외국에 사신으로 가 있는 사람은 자기 나라 정부의 의사를 언제나 똑똑히 알아도 하늘나라 사신으로서 그 뜻을 분명히 가지고 있어야 한다.
바오로는 이 영원한 사신을 분명하게 나타내었다.『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느님이 우리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느님과 화목하라』(꼬후 5~19ㆍ20) 심판에는 외로우사, 죄인을 거저 두시지 않는 하느님 만물의 처음과 나중이시므로 그의 예정하신 승리를 향하여 전진하시는 하느님, 사람이시어서 우리를 놓치지 않으시는 하느님, 인자하시고 은혜가 충만하셔서 상한 갈대에도 마음을 쓰시어 시드는 백합화에 눈여겨 옷 입히시는 하느님, 영원히 변치 않으시며 죄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이 예수를 통하여 우리 앞에 나타나시었다. 예수 앞에서 영원한 하느님이 시간 안에 나타나셨으며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육으로 나타나셨으며 편재하신 하느님이 한 고장에 나타났으며 외로운 사랑의 하느님이 십자가 위에 나타나셨다. 폭력이 그를 그의 길에서 휩쓸어 가는 것 같았으나 그는 여전히 그의 세상을 지키셨다. 우리가 무서워하는 것 모든 것이 지나가는 그림자로 사라진 후 그는 여전히 만물을 이끌고 그의 방향으로 전진하고 계신다. 이 신념만이 인간을 구속에로 이끌 수 있다.
인격보다 소유물을 더 높이는 세속주의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는 다 형제라는 진리를 부인하는 인류차별주의, 움직이는 데만 관심하고 그 방향 여하에는 무관심한 과학주의, 인간 이성의 피안(彼岸)에서 오는 소식에는 일부러 귀를 막는 주지주의(主智主義), 절망선(絶望線) 밤은 보지 못하는 실존주의, 이런 그물에서 인류를 구원할 능력의 소재는 오직 이 크리스찬 신념뿐이다. 이상하게도 인간들은 이 신념을 다시 들으려고 갈구하고 있다.
철의 장막 뒤에서 공포와 억압에 허덕이는 인간들은 하느님으로 목말랐다. 이 세대는 자기에게 실망하였다.「인간 결국」(人間結局)의 저자의 말을 인용한다면『많은 지성인들은 자기가 버림받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들의 심정은 불안과 불가해의 의문으로 가득 차 있다』하였다. 현대인은 그를 따라 가다가 막다른 골목에 부딪쳤다. 세상에서 초월한 무엇이 없이는 생의 설명은 불가능하다고 탄식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이 세대인에게 향하여 인간 논리와 이해를 뛰어난 진리가 있음을 말해 주어야 한다. 깊은 신념을 가지고 이런 시대에 외치는 사제는 운집하는 청중을 얻는 데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좋은 사제가 되기 위하여 신념(Conviction)이 첫째로 필요하다면 그 다음은 애정 거룩한 정열(Compnssion)일 것이다. 분명하게 생각함과 동시에 깊이 느껴야 할 것이다. 사제는 피곤한 세상에 살고 있다. 세인들은 일을 하느라고 해 보느라고 피곤하다.
배고프고 병들고 헐벗고 침략당하는 이런 모든 것에서 벗어나려고 허덕이고 있다. 이런 원시시대의 공포가 20세기 현대에 나타나고 있다. 사제는 졸상(拙象)의 상아탑에서 나와 이런 사람들을 위하여 무엇이고 일해 주어야 한다. 아모쓰나 이사야 같은 옛날 예언자로부터 많은 성현들이 예외없이 민중에게 애정이 통하는 일들이 있다. 모세도 그의 형제들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업에 있어도 영광스러운 장면이 많다. 그의 생애에서 가장 빛난 점은 친근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는 죄인들에게 자기를 일치시켰다. 그는 민중의 슬픔을 자기 영혼 속으로 끌어들였다. 그는 인간의 비참에서 초연할 수 없었다. 그는 간질병자에게 자기를 쏟아넣었으며 문둥병자 눈먼자 앉은뱅이들이 헤매는 암흑의 거리에 자기를 파묻었다. 그는 가장 깊은 애정의 소유자였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만일 애정이 없다면 현대의 모순도 허무도 말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사제가 무관심의 얼음덩이로 더운 몸을 식혀가며 현대가 주는 안일을 향락하기는 심히 쉬운 일이다. 그는 상아탑 속에 높이 앉아 잡다한 거리를 내려다보다가 상을 찌푸리며『무슨 놈의 뒤죽박죽이야』하고 커탠을 내려 버리는 것이 상투적인 태도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될 것은 하느님께서는 이런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성자를 주시기까지 하셨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는 냉소주의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내가 다시 해산의 수고를 하겠다』한 바오로를 본받을 것이다.
좋은 사제가 되는데 또 하나 갖추어야 할 것이 있다. 우리는 알고 느낄 뿐 아니라 무엇이 되어야 한다. 신념과 애정 위해 또 다시 품격이 형성되어야 한다.
Conviction, Compassion, Character, 분명하게 생각하고 깊이 느끼는 것은 고상하게 사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진실한 성격이 조성되지 않고는 생각이나 감정이나가 다 그 터전을 잃은 것이 된다. 그는 하느님 의식과 그리스도 신앙으로 충만함과 동시에 깨끗한 심정의 소유자여야 한다. 그의 성격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룬 것이 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그의 설교보다도 그 뒤에 있는 인격 자체를 보는 것이다. 나는 나이 먹으면 먹을수록 이 한 가지에 확신을 가지게 된다. 그것은 사제가 성공하는 정도는 그의 생활의 질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그것이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율법적인 고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성신의 은사를 받아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으레 참음과 온유와 착함과 믿음과 자비 등의 열매 맺는 생활을 보이라는 것이다. 사제가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말이란 지나가는 것이다. 하느님의 진리는 어떤 고정된 말의 기록에 화석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떤 이념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어서 느끼고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거룩함과 사랑 덕 같은 말은 성격을 떠나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종교가 참으로 진실한 것이 되려면 그것이 횃불처럼 불붙고 별처럼 빛나야 할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말로만 건설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삼단논법으로 인류를 구속하지는 못할 것이다.
말에 너무 치우치는 것은 지금까지의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가장 큰 폐단이었었다. 그리스도교는 말보다 생활의 종교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나를 변호해 달라고 요구하시지 않는다. 그리스도교는 화평과 사랑과 능력을 가져온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생활에서 오는 것이요 말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제가 설교할 때마다 반성할 것은 내가 지금 말하려는 것은 정말 소리냐 산울림이냐 신념에서냐 내 생활에서냐 하는 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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