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질병으로부터 구하자는 것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인간의 간절한 소망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 소망은 교회가 인간의 영혼을 죄악으로부터 구하려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업과 함께 인류 역사가 계속되는 동안은 완전히 채워질 수는 없을 것이다. 먼저 말한 소망은 인간의 자연적인 소망의 하나이고 후에 말한 소망은 초자연적인 소망이면서도 그 두 가지 소망은 함께 인간 완성을 통한 인류 구원의 과정에 있어서 서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TV에서「평화의 계곡」이라는 환상영화가 방영된 일이 있다. 깊은 숲 속으로 차를 몰다가 길을 잃은 한 청년이「평화의 계곡」이라는 팻말이 붙은 환상의 소도시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곳에는 인간이 필요로 하는 모든 물건의 득실과 인간의 생과 사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지식과 그 장치를 가지고 있다. 청년은 그런 지식과 장치를 지구인에게 공개한다면 고통 받고 있는 수많은 난민과 수없이 죽어가는 병자들을 구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그 공개를 요구한다. 그러나 그곳의 시장은 그 간절한 청을 단호히 거절한다. 문제는 왜 거절하느냐의 이유를 말하는 단사에 있다. 지구인들은 극히 원시적인 지식에 불과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마저도 인간들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이용하기는 커녕 인간을 대량으로 살육하고 지구를 파괴하는 데 사용하지 아니 했느냐는 반문과 질책이다.
오늘의 어떤 인간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없게 하고 모든 고통과 부족을 없게 하는 꿈 같은 선물 상자를 준다면 그 인간들이 과연 그 선물을 오로지 자기 완성에 이용할까? 정치인들은 그 선물을 오로지 세계 평화와 인류 공동체의 완성을 위해 이용할까? 누구도 자신 있는 대답을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인간이 겪어야 하는 생사와 고통과 질병은 어떤 개인에게 주어지기 전에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개인의 질병은 그 환자의 고통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부모 형제는 물론 인간 전체의 고통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 고통을 덜게하고 질병으로부터 구하는 일은 비단 그 환자만의 소망이나 책임이 아니라 인간 전체의 소망이고 책임인 것이다.
이와 같은 자각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따르는 사람일수록, 형제애로써 인류를 이해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절실해야 할 것이다.
오늘은 우리 교회가 정한 구라주일이다. 수많은 나환자들의 영혼과 육신을 구하는 데 특별한 관심을 환기시키고 실천하자는 것이다.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이 가르치는 우리들의 형제 자매임을 깨닫고 그들이 받고 있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함께 아파하고 물심양면에서 형제애를 다하자는 것이다. 그 질병과 고통이 인류 공동의 질병과 고통임을 깨닫고 모든 인류가 함께 그 고통을 나누고 그 치유에 힘쓰자는 것이다.
질병은 그 모두가 육체 또는 정신에 어떤 결함을 주는 것이지만 그 중에서 극단적인 두 가지 유행이 있다.
그 하나는 육체에는 결함이 없는데도 정신이 상실된 정신병 환자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에는 결함이 없는데 육체가 상실되는 나환자이다.
따라서 환자 자신의 고통 면에서만 말한다면 서로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난다. 나환자는 육체의 질병 가운데서도 가장 심한 소외의식 속에서 그 육체적 고통에 비할 수 없는 정신적인 고통을 받아왔다. 비록 오늘에 와서 의학의 발달로 그 질병에 대한 바른 인식이 계몽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환자 자신의 소외의식을 덜어주기 위해서는 일반 사람들의 보다 많은 이해와 협조가 절실하다.
교회가 일찍부터 많은 환자들 가운데서도 특히 나병 환자에 대한 구제사업을 벌이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일반인이 혐오와 저주 속에 버림 받은 나환자들을 어루만져 줄 사랑의 손길은 자모이신 교회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국가가 멀리 격리시킨 나환자촌을 찾아간 첫 형제가 바로 그들의 영혼을 걱정하는 성직자들이었고 그 뒤를 이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의사 사회 사업가들이었다. 이와 같은 교회의 꾸준한 솔선수범과 계몽에 따라 이젠 세계적인 보건사회운동으로서 구라운동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위정자나 일반인들의 이해와 협조가 부족할 뿐 아니라 우리 신자들의 노력이 또한 크게 미흡하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구라운동은 환자들의 영혼과 육신을 함께 구하는 운동이라야 한다. 영혼을 돌보아 주고 병을 고쳐 주고 생활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이와 같은 일은 일시적인 감상이나 자비심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크게 보아 인류의 고통을 대신하고 있는 그들에 대한 인류 공동체로서의 책임과 의무 의식을 자각하는 데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인류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각자의 각성이 필요하고 특히 공동체의 지도와 그 책임을 맡고 있는 위정자, 사회 지도자들의 각성이 더욱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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