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문학이란 문학 중에서도 특수한 분야로 구분 지어 있겠지만 반드시 종교를 주제로 한 종교문학을 떠나서도 모든 작가는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에 그 연원(淵源)이 닿지 않고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어떤 작가에게 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하니까 인간에 대해서만도 할 이야기가 너무나 많은데 신에 대해서 즉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논할 여지가 없더란 말을 듣고 생각해보았다.
인간에 대한 혹은 자연에 대한 현상 자체를 예술적으로 추구하는 그 자체에는 그러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거기엔 그 현실 자체를 그림으로써 어떤 흥미를 갖게 하고 나아가서는 심미적인 추구도 있게 될 것이다. 흔히 예술은 공리적인 목적에서가 아니라 예술 자체 추구에 순수한 의미가 있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예술이 단순히 신비적인 추구이든 혹은 현실 참여 내지 그 개조에 목적이 있고 그 이상의 것이 아니라면 예술도 어떤 한계에 머무르고 말지 않을까. 도대체 인간을 추구함에 있어 그 존재의 근원 내지 신비에 도달하는 것은 필연적인 과정이 아닐까. 그러므로 문학이 혹은 예술이 인간에 대한 추구였을 때 그것은 끝내는 심미적인 가치 혹은 현실 자체를 넘어서서 근원적인 문제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예술이 단순히 현실 내지 심미적 추구에 멎지 않고 그러한 가치 이상에 대한 향수를 가짐으로써 무한을 지향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럼으로써 진정한 예술은 현실 표현이나 심미적인 추구의 과정에서 본래의 목적 이상의 가치에 이를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자체로서도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한다』
도스토예브스키의 이 말의 심오한 깊이와 함축성은 참으로 예술의 모든 가치 추구, 존재 이유를 밝히고 있지 않는가.
예술은 아름다움의 추구이면서 이미 인간 구원을 과제로 하고 있다. 예술은 그 자체 아름다울 수 없을 때 이미 예술이 아니며 아름다움을 지님으로써 예술일 때 이미 예술적 가치 이상에 도달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예술은 세상에 대한 구원의 역할이나 혹은 인간에 대한 구원적인 문제에 필연적으로 이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가가 반드시 그리스도교니 불교니 이런 기성종교의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문제가 아니다.
그들이 진지한 예술적인 탐구자로서 인간의 문제 우주의 궁극적인 신비에 대해 추구 내지 인식함에 있어 그 지향이 긍ㆍ부정을 막론하고 종교적인 의미를 배제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에 대해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 필요도 없다는 예술가 작가들을 볼 때 무엇인가 예술가로서의 본질적인 소망이나 그들의 심혼의 깊이가 의심스럽다.
▲지금까지 박갑성 교수님께서 수고해 주셨습니다. 이번호부터는 이인원씨가 집필해 주시겠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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