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고향「나자렛」. 사막과 황무지로 둘러싸인 가난한 동리. 그리스도의 탄생지는 물질이 풍요한 기름진 땅이 아니었다. 청빈을 가르치기에 안성맞춤인 그곳을 하느님은 당신의 탄생지로 선택하셨다. 복음에 기록된 그의 생활과 죽음 역시 빈자(貧者)의 고난,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마음으로만 가난한 게 아니었다. 일상생활을 통해 실제로 가난하게 사심으로써 세말까지 계속될 교회 생활의 모범을 보여 주셨다. ▲그러면서 그리스도는 부(富)의 위험을 여러 번 강조했다. 그것이 천국에 들어가는 데 장애가 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보다는 나타가 바늘 귀로 빠져나가기가 더 쉬울 것이라고 비유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고 가난이 곧 천국행을 보장한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것이 하느님을 거역한 징벌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으름과 방종, 그릇된 삶의 결과로 가난한 경우가 그렇다. 반대로 물질적 번영과 안정이 경건한 사람에게 보장된 하느님의 은총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물질적 풍요를 누리면서 재물에 초연한 내적 겸허를 조화시키기가 어려운 데 문제가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많은 사람들은『가난도 부(富)도 원치 않으니 오직 필요한 음식만 허락해 주길』기원한다. 특히 사제들과 수도자 대부분은 이런 사제로 봉사하고 있다. 그리스도처럼 마음으로 가난할 뿐 아니라 실제로 가난 속에 뛰어들어 생활하고 기를 쓰고 있다. 그렇다고 영적(靈的)으로 부유함을 자부하며 교만하지도 않다. 그때문에 그들은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초대교회 때 그리스도를 따르던 교부들 가운데 부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마태오 27ㆍ57) 그들은 마음이 가난한 내적(內的) 겸허와 빈자에 대한 관심이 지극한 부자였다. 그러나 요즘 물질만능시대가 도래하면서 전혀 다른 의미의 교부가 간혹 있는 모양이다. 교회 쇄신을 부르짖으며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노력을 경주해 온 지도 10년이 넘었다. 그러나 아직도「있는 자의 교회」라는 오명을 씻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변두리 교회와 시골본당을 도와주는 너무도 당연한 미담조차 찾기가 어려운 형편이다. 성당보다 사제관이 중시되는 풍조가 말썽이 되는 현실이 슬프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