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도 이미 일순이 지나갔다. 사순절은 빠스카의 축제를 준비하기 위해 그간의 전례로서 성세 예비자들은 입교 절차의 여러 단계를 통해서, 신자들은 이미 받은 세례를 회상하고 참회 행위를 통해서 빠스카의 신비 체험을 준비하기 위해 선정된 계절임을 우리는 주지하는 바다. 그러므로 사순절의 성세와 보속의 두 가지 성격이 뚜렷하다. 전례헌장은 초대교회의 성세 후보자들을 위한 단계적 입교 절차의 전통을 복구시키기를 촉구한 바 있어 이미 이러한 단계 입교 성사 예식서가 나왔고 우리말 번역도 완성된 것으로 알고 있거니와 주교단에서도 이 예식서가 하루 빨리 출판되어 널리 이용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이는 비단 성세 후보자들을 위해서만 큰 뜻이 있을 뿐 아니라 온 교회의 신자에게 성세의 은혜를 상기하고 그 결단을 갱신하는 준비로서 사목적으로도 큰 뜻이 있어 주의 부활을 맞이하는 최상의 준비가 되기 때문이다.
다음 사순절의 참회는 내적이며 개인적인 것이어야 할 뿐 아니라 외적이며 사회적인 것이어야 한다. 죄는 공동체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를 실천함에 있어서는 시대의 요구를 받아들여야 함은 당연하다. 옛날의 단식이나 고행의 방법이 현대인에게 부적당하기에 현대에는 현대에 알맞는 사회성을 띤 구체적인 방법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그럼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스도의 단식, 또 성인들의 고행에 넘친 생활은 현대인에게도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 참회의 양식은 변할 수 있으나 그 정신은 변함이 없다.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의 고속화는 없을 것이며 그 나라로 들어가는 문은 여전히 좁다. 그래서 오늘 우리 시대에 적절한 보속은 차라리 사랑의 표시로서의 실천이 좋을 것 같다.
이러한 작은 희생마저 거부한다면 언젠가 큰 희생이 닥쳐올 때 손을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순절에는 달팽이 같은 자기라는 껍질에서 탈피, 자신을 개방해야 한다. 이것도 하나의 희생임에는 틀림없다.
수중에 있는 것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러한 희생을 과연 좋아하실까? 마태오복음 저자가 저 유명한 제25장을 기록한 후부터 이웃에 대한 모든 종류의 사랑의 행동이 하느님께 한 사랑의 행동의 다른 양식이 되었다. 그리스도는 얼마만큼을 남에게 줄 수 있는가 하는 금전의 량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그의 눈에 중대한 것은 마음이다. 그는 우리 안에 당신의 마음과 비슷한 마음을 발견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재물은 우리 안에 그러한 마음을 파괴하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다. 소유하고 있는 물건에 집착하는 마음은 그리스도처럼 십자가상에서 알몸으로 자신을 주는 그러한 열린 마음이 아니다.
이렇게 부자는 쉽게 잔인하게 되어 자기 옆에 괴로워하고 가난한 자가 있어도 눈에 들어오지 아니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스도를 선택한 그 순간부터 우리 마음이 또 하나의 다른 그리스도인 우리 이웃에게 열리고, 가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깨달아 재물에 집착하지 아니하는 일이다. 그때 우리 이웃은 그 때문에 덕을 보게 된다. 후진국에서 인구의 65%가 기아 선상을 헤매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소위 선진국에서도 인구의 1할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것마저 못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예를 들어 어떤 나라에서는 가난한 자가 인구의 1할인 90만 명이 된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그 두 배가 된다고 한다.
가난한 자에 대한 사랑의 위대한 사도는 예외 없이 모두 가난한 자였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자기 재산 전부 혹 그 일부를 무슨 자선사업에 기부한 자는 자기 의무를 다한 것뿐이다.
우리나라 경제 수준이 향상되고 있다. 위정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위해 얼마만큼의 복지 대책을 예산에 반영시키고 있는가. 또 모두가 더 잘 사는데 도둑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날뛴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크리스찬의 소명은 살기 위해 돈을 버는 일만이 아니다. 비신자도 그것을 하고 있다. 16세기에 소위 개신교가 구라파를 뒤흔들었을 때 성 프란치스꼬 사베리오는 구라파를 떠났다.
투사가 부족한 그때 어떻게 동양에 갈 수 있었냐고 그분에게 물었다면『더 큰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단순히 돈 때문에 멀고 험한 바다 여행의 위험을 무릅쓰고 선교사들보다 앞서 동양에 간 상인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견디기 어려워 구라파를 등지고 동양에 간 것이다. 그에게 돈에 대한 애착은 손톱만큼도 없었고 다만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이 강했을 뿐이었다. 사순절은 그리스도적 생활을 점검하고 성세성사 때 그리스도와 일치된 것이 해이해졌으면 이를 졸라매고 그리스도께 다시 돌아가야 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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