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기차를 탔기 때문에 10시가 훨씬 넘어 집에 들어섰다. 선거구를 일주일째 돌아보고 오는 길이다. 원곤이는 벌써 잠이 들어 있었다. 감기가 들어 수척해진 얼굴로 떠났다가 그새 다시 토실토실해진 녀석을 내려다봤다. 아빠를 기다리다가 잠자리에 들면서 라디오를 머리맡에 켜논 채 잠이 든 것이다. 라디오를 틀면서 녀석은『아빠가 왜 안 오시나. 광복 20년을 내가 들어 두어야지』라고 중얼거리다가 미처 듣지도 못하고 잠에 빠진 것이다. 나는 씽긋 웃었다. 그리고 녀석의 볼을 한 번 쓰다듬어 주었다. 광복 20년은 C방송의 일일「다큐멘타리」프로인데 내가 즐겨 듣는다는 것을 녀석은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정계에 몸 담은 초년병인 나에게는 1952년 정치 파동의 야사가 대단히 흥미진진한 것이다. 이런 아빠의 관심을 어느새 알게 된 녀석이 대신 그 프로를 들었다가 나에게 줄거리를 이야기해 줄 심산이었던 것이다.
국민학교 2학년짜리 녀석으로서는 어려운 내용이지만 아빠의 권동을 눈여겨둔 녀석의 마음 씀씀이에 감사하고픈 심정이다. 결코 행복하다 할 수 없는 결혼생활 끝에 자녀 하나 출산치 못한 초로의 처 고모의 말이 불현듯이 생각났다.『자식 없는 놈만 서러워. 귀찮을 때도 있지만 새끼가 있어야 해』그런 탄식을 번번이 들을 때마다 별로 실감을 못 느껴 왔었지만 요즘은 진의를 터득할 듯한 그런 심경이다. 20여년 전 넉넉치 못한 집안 형편 속에서 서울의 고등학교를 다니던 때의 일들을 잊을 수 없다. 그때 아버님은 일정한 직업 없이 하시는 일마다 실패의 연속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부산 집에서의 학자금 송부가 여의치 못할 때가 많았으므로 하숙도 했다가 자취도 하는 불안정 속에서 학교를 다녔다. 하루는 아버님이 상경하셨다는 기별이 왔다. 하숙비라도 기대하면서 지금 화신백화점 뒤의 어떤 여관으로 갔다. 친구분과 같이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이런저런 궁금한 것을 물어보신 후 액수는 기억할 수 없지만 한 달 하숙비는 족히 될 돈을 주셨다. 그때 아버님은『이 돈은 이 친구하고 물건을 사러 왔다가 계약을 하고 남은 돈인데 곧 더 보내 줄게』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게 떠오른다. 훨씬 뒤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 돈은 그 친구분께 빌리신 것이고 물건 계약하러 상경하신 것이 아니라 순전히 나의 학자금 마련 때문에 오신 것이다. 늘 쪼달리는 속에 지내고 있는 터에 멀리 떨어진 자식이 사기라도 잃지 않을까 염려하신 나머지 곧 집안 형편이 펴진다는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서 그런 말의 여유라도 보이신 것이다. 예상액보다 적은 돈을 보내실 때는 고금동서의 좌우명이 될 많은 선인들의 어록을 꼭 적어 보내 주셨다. 그때 배워둔 어록으로 연설할 때 인용해서 써먹는 것이 아직도 많이 있다. 어린 나이었지만 그 아버님의 아픈 마음을 그 어록들에게 꿰뚫어 볼 수 있었다. 그런 상처를 아버님의 가슴을 꿰뚫고 엮어가면서 나는 자란 것이다.
이제 아버님은 곧 고희에 이르시게 되었고 나도 아버님과 같이 결혼식 주례를 서도 어울릴 만큼 나이를 먹었다. 그리고 막내 원곤이가 벌써 그 아버지를 생각해 주는 나이까지 된 것이다. 부모의 마음은 가이없다더니 아버님은 지금도 이 자식 걱정이다. 연세에 비해 건강하신 때문에 식사량도 나보다 많으시다. 겸상해서 부자 간에 식사할 때면 나는 아버님의 심려를 생각해서 과식을 각오하고 억지로라도 많이 먹어야 한다. 밖에 다니시면서도 이 자식의 공인으로서의 평가와 평판을 눈여겨보고 새겨 두셨다가 반드시 일러주시고 계시다. 혹시 나에게 오해라도 있다 싶은 사람이 있으면 불원천리하시고 찾아다니시는 것은 늘상 있다시피 한 일이다. 이 한없는 아버님의 사랑 앞에 나는 아직도 갓난아이나 진배없다. 아무리 해도 부모의 은혜를 만에 하나라도 보답키 어렵다는 선현의 경구가 새삼 가슴을 친다. 길다고 할 수 없는 여생 동안만이라도 나는 정성을 다해야지. 바로 이 순간 아버님과 元이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