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다는 옛 속담대로, 사람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 늘어나는 그만큼 사회에는 별의 별 문제들이 다 발생하기 마련이다.
이제는 감각이 무디어진 탓으로 그런 사건을 만나도 충격이 덜해지긴 했지만, (충격에 무디어지게 된 것이 좋은 현상인 것은 아니다) 그때마다 가슴이 덜컹덜컹하던 사건들이 정치ㆍ경제마당 여기저기서 얼마나 빈번히 터지곤 했던가. 그래서 불안하고 분노에 찬 밤을 자주 지새곤 했던가.
그런데 또 한 번 우리를 크게 놀라게 한 사건이 신문지면을 며칠 동안 크게 채우고 있었는데 다름 아닌 소위, 「정 건강관리소」를 위시한 일부 의료계의 의료부정 사건이 그것이다. 멀쩡한 사람의 90%이상을 결핵이라고 허위진단을 내려 약한 개인들을 불행에로 이끌었다니, 또한 그런 사실이 의료계에서는 공공연한비밀이었다고 하는데 아무런 제재가 없어 믿고 찾아온 환자들만 속고 날벼락을 맞았다고 하나 그 배반감의 폭이야말로 다할 수 없을 노릇이다.
그런 부조리가 어디 우리뿐이냐. 너희들은 그런지 아니하냐고 반박한다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이 기회에 의료계에 종사하는 분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하느님 앞에서 의료인으로서의 자신을 재점검해 봐야 할 당위성이 제기되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의사의 오진은 하느님도 외면하신다던 가….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이 의료계 전체에 관심을 보낼 필요는 전혀 없다. 신뢰가 가장 큰 덕목이어야 하는 환자와 의사 사이에 조그마한 불신이라도 자리하게 되면 진정한 치료는 불가능하게 될 것이며 그 보다는 양심적으로 자기직무를 잘 수행하는 의료인의 수가 훨씬 더 많겠기 때문이다.
문제는 더 깊은 곳에 있다. 사회가 온통 한탕주의 풍속에 뒤덮여 있는 것, 순서를 지키는 사람만 바보 취급당하게 되고 순서를 어기고 앞에 가는 자가 더 의기양양해하는 분위기, 정작 규범을 깨뜨린 부정의한 자가 정의를 더 크게 외치고 다니며 득세하는 것(이를 일러서 지난 선거 때 모 후보는 도둑이 더 큰 소리로 도둑놈 잡아 라고 외치는 격이라 말했던가) 등 이런 무 규범적 분위기의 풍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책임의 큰 부분은 정치마당에서 져야 한다. 왜냐 하면 사회 구성원들의 욕구나 문제들에 부응해서 처방을 내리는 일을 아주 단순히 말해서 정치라고 할 때 정치는 우리네 삶의 구석구석과 불가피한 관련을 맺고 영향 미치는 것이므로 그 책임 또한 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동안 얼마나 비뚤어진 길을 정치가 걸어왔길래 이 시점에 와서 마당을 근본부터 헤집어 보아야 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잘 알 수가 있다. 그래서 이 시대의 사조적 경향 중의 하나가 바로「○○선언」하는 즉 선언의 홍수인가 보다.
옷을 입을 때 단추를 잘못 끼고 사람들 앞에 나서보라. 그러면 아무리 근엄한 표정을 지어도, 또 단추를 똑바로 끼었노라고 빡빡 우겨도 웃음거리를 면하지 못한다. 아니 우기면 우길수록 더더욱 심한 조소의 대상이 되고 만다. 그러니 각계각층의 지도층들, 소위 이 사회의 건강관리담당자들이여! 이 사회의 건강을 관리한답시고 설치기 전에 내 자신의 정신건강상태부터 먼저 점검해 볼지어다. 즉 나의 옷의 단추는 제대로 끼워졌는지를 먼저 살펴볼지어다.
사회가 이처럼 윤리적 무규범 상태로 빠지게 된데 대한 책임이 그러면 우리 신앙인에게는 없는 것인가?
말하자면 우리는 단추가 제대로 채워진 옷을 입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 것인가? 만일 주님께서 그 상황에서 『너는 무얼 하고 있었느냐? 너 어디 있었느냐』고 물으시면 나의 대답은 어떠할 것인가?
주님의 윤리적 교훈의 진수는 「여덟 가지 참된 행복」이 포함된 산상 설교에 잘 나타나 있다. 거기서 주님은 우리 크리스찬의 행위기준을 「그 이상으로」 「보다 더」 (마태오 5장 19절 참조)라고 제시하신다. 즉 크리스찬은 시류에 휩쓸려서 대충대충 살아가서는 아니 되고 「더 옳게 살아야 한다.」고, 「더」라는 기준을 삶의 지표로 정해주신 것이다.
그렇다. 사회의 한탕주의 풍조와 부패와 불의를 탓하고만 있기에 앞서 우리 교회는 진정한 사회 건강관리의 역할을 방임하지 말아야하며, 그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그 구성원인 우리 신앙인들은 나의 옷매무새부터 먼저 점검해 보아, 주님의 윤리 기준인 「더 옳게」의 척도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특히 지식층 신앙인들은 더욱 그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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