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밤 TBC-TV는 영국 명화「사계의 사나이」를 방영했다 성 토마스 모어가 크리스찬으로서 대시련(大試鍊)을 겪는 장면들이 감격적이었다. 성 토마스ㆍ모어는 군주의 분노가 곧 죽음을 의미함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헨리 8세가 왕비 캐더린과 이혼하고 앤ㆍ볼린과 재혼하는 것을 반대했다. 이혼 소송으로 인하여 교회와 대립, 스스로를「영국 가톨릭 교회와 성직자들의 유일한 보호자이며 수령」이라 선포했던 헨리 8세를 그는 국왕을 설득하여 비행을 막아보려 했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분쟁을 피하여 사표도 제출해 보았다. 그러나 즉각 수리되지는 않았다. 그의 정적들은 이때를 이용, 모략으로 그에게 모반대역(謨叛大逆)의 죄목을 뒤집어씌웠다. 1532년 5월 16일 수당직을 사임한 그는 이듬해에 있었던 왕비 앤ㆍ볼린의 대관식에도 참석치 않았다. 1534년 4월 17일 드디어 그는 런던탑의 토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다음 해 7월 1일에는 사형 선고를 받았고 그달 6일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성 토마스 모어는 국민학교를 나와 모오른 수상의 문하에 들어갔고 14세에 이미 옥스포드에서 학창 생활을 시작했다. 이어 런던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여 출중한 인문학자요 법조인이 됐다. 26세 때 하원의원과「런던」시 부시장을 겸임했고 외교사절(37세)과 재무차관(44세)을 역임한 후 하원의장과 케임브릿지 및 옥스포드대학교의 이사직을 겸하다가 51세 때는 마침내 제국의 수상이 되었다. ▲그는 재산도 많았다.「런던」「템스」강변에 훌륭하고 아름다운 저택이 있었다. 그 저택은 도서실 미술관 성당 공원 과수원을 갖췄다. 많은 하인들이 시중을 들었고 귀중한 소장품이 가득하였다. 집안에는 전속 광대까지 두었다. 토마스 모어는 이런 저택에서 가족 친지와 더불어「천진한 오락을 좋아하고」행복한 삶의 멋을 알고 또한 즐겼다. 그는 아내와 1남 3녀들도 극진히 사랑하였다. ▲그러나 토마스ㆍ모어는 신앙과 정의를 위해 이 같은 그의 행복과 권세를 헌 신짝 같이 버렸다. 양심을 어겨 국왕의 비행에 동의했다면 형벌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수상직을 포기할 필요도 없었고 재산을 몰수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가정을 포기하 지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현세의 모든 영화를 다 누릴 수 있었다. 그는 세속 안에 있으면서도 세속에 묶이지 않았고 재물을 즐길 줄 알면서도 소유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는 세속으로부터의 자립과 신(神)을 위한 내적 자유를 끝까지 지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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