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렸을 적만 해도 못된 시어머니 등살에 눈물과 한숨으로 세월을 보낸다는 며느리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집안 살림을 꽉 틀어쥐고서 며느리에게는 꼬린 동전 한 푼 마음대로 쓰지 못하게 하면서 심지어는 아들 내외의 안방에까지 간섭을 불사한다는 감때 사나운 시어머니.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어린 마음에도 공연히 의분 같은 것이 솟아나던 기억이 희미하게나마 난다.
『원 세상에 그럴 수가』남의 이야기는 그만 두고라도 당최 우리 집안의 경우를 두고 보더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호랑이 같은 대방 마님이시던 내 할머님께서는 그야말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대씨족장이셨다. 어른의 일성대갈이면 온 집안이 머리를 조아렸고 그 며느님 역시『귀 먹어 3년 벙어리 3년. 장님 3년』의 봉건적 부도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고초 당초 맵다 한들 시집살이 비길소냐…』하는 속요가 그런 대로 있을 법한 일로 여겨지던 그런 시절-의 마지막 세대가 나의 어머님 세대였던 것 같다.
그 세대는 이를테면 이광수 식의 어중간한 계몽주의를 체득하고 실천하려 한 세대라 할 수 있겠다.
신학문을 배우고 봉건적 속박에 대한 혐오감을 키웠으면서도 주어진 현실의 울타리를 과감하게 뛰어넘을 수는 없었던 2중성이 그네들의 한계라면 한계였다.
그래서 봉건적 가족제도를 거부하고 여성의 해방을 실천하는 과제는 불가불 그네들의 딸과 며느리들에게 물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일은 아주 썩 잘 되었다.
정계에서 택시 운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무교동 막걸리집에서 대학 연구실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우리 여성들의 진출상은 과시 눈부신 바가 있다.
봉건적인 대가족제도는 허물어지고 결혼만 하면 대개는 오리엔테이션의 과정도 거치기 전에 대번 핵가족이라는 창살 속에 단 둘이만의 둥우리를 튼다.
남편이라는 자들의 콧대나 척추도 상당히 말랑말랑해지고 노글노글해졌다.
이젠 해지기 전에 물 한 독 길어 놓고 고추방아 찧어 놓고 보리 한 섬 빻아 놓는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병든 시어머니의 오줌 똥 받아내는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될 일이다. 아주 여간 잘 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변괴가 일어났다. 도봉산 양지 바른 언덕받이에 두 늙은 내외의 변사체가 발견된 것이다. 아들놈들과 며느리들의 냉대가 견딜 수 없어 유서를 써 놓고 자살하고 만 것이다.
며느리 학대시대는 去하고 시부모 수난시대가 來한 것인가. 아니면 청년문화가 來한 대신 노인문화가 去한 것인가. 확실히 세상은 뒤바뀌고 있다. 요즘 들어 자식의 임종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는 노인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린다. 뒷방 한 구석에 쳐박아 놓고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으니 시름시름 않다가 제 풀에 까스러지는 노인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그런가 하면 그 미국 유학인가 하는 것을 갔다 온 며느리들 이야기도 가끔 듣게 된다. 도대체 무슨 공부를 어떻게 했는지 세상에 깔끔하고 깨끗한 척은 혼자 다 하면서 시어머니는 냉장고 문도 함부로 못 열게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손자 녀석들까지 덩달아 제 어미와 한 패거리가 돼 가지고 할머니를 더럽다고 손가락질을 한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신식 며느리 상전에 눌리고 핵가족과 아파트 때문에 고독에 눌리고 밖에서는 청바지 통키타 떼거리들의 행패 때문에 기를 못 펴고 그렇다도 할 일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만약 이것이 우먼ㆍ리브와 청년문화의 불가피한 부산물이라면 이젠 아무래도 무슨 수를 좀 써야만 할 것 같다. 딸이 귀엽다고 굴레 벗은 말처럼 방목하지만 말고『어른들 앞에서는 이리 하는 법이니라』하는 것을 어렸을 때부터 한마디라도 일러 주어야만 할 성싶다. 그러지 않다간 우리 세대가 늙을 무렵이면 노인들이 정신적 고려장으로 지레 죽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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