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열흘 만에 오신다는 성신강림대축일!
지난해였다. 12년의 병상생활로 십여 년 동안 한 번도 교회를 가보지 못한 나는 슬픈 마음이 되어 걸을 수 있는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전날 아침부터 내리고 있는 빗소리를 들으며 하염없이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뒷뜰 담장 곁에 있는 장미나무 가지에 하루 전만 해도 보이지 않던 꽃망울들이 빨갛게 고개를 들고 누가 더 많은 꽃잎을 피워줄까 자랑이나 하듯 서로가 비에 젖어 잘 익은 앵두알처럼 선명해 보이는 것이 아닌가?
나는 문득 내일 아침 저 장미꽃이 피어나면 내게도 성신께서 임하신 증거라고 혼자만의 생각에 가슴이 부풀었다.
언제나 누워서만 생활해야 되는 삶이기에 나는 곧잘 모든 사물에 대한 인식을 체념해 버리는 대신 이런 식으로 늘 표현하며 자기 도취 속에 빠져 버린다.
이튿날 아침 새벽 잠에서 깨어난 나는 제일 먼저 장미나무에다 눈을 주었더니 아! 거기에는 정말 놀랍게도 붉은 장미꽃이 활짝 두 송이나 피어 대축일 아침 미사 참례도 할 수 없는 나를 환한 모습으로 반겨주는 게 아닌가. 정말 뜻 밖이었다. 이토록 마음 속에 간직했던 생각들이 드러날 수 있을 줄이야…. 나는 신기하리 만큼 커다란 기쁨을 발견했다. 이것이 비록 우연이든 필연이든 간에 누구나 보아서 즐겁고 반길 수 있는 꽃이 아름답게 피어났다는 것.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 나는 족한 것이다.
이 장미나무는 내가 걸을 수 있을 때 우물곁 모수에서 꺾꽂이를 해 보겠다고 세 가지를 잘라다 뒤안 담장 곁에 심은 것인데 그 중 한 가지만 살아서 가을만 되면 제거해야 되는 잡초 속에 묻혀 몇 차례씩 수난을 당하고 그러면서도 봄만 오면 다시 또 움이 돋아나 억세고도 끈기 있게 버티며 요근래의 몇 년 동안 매년 이맘 때쯤에서 그리 탐스럽지는 못해도 핑크색 빛깔로 아름답게 꽃을 피워주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보아주는 이 없어도 외로와도 절망하지 않고 굳세게 잎을 피워주는 꽃의 의지! 그 꽃은 마치 나를 보라는 듯 나만을 위해서 피어난 것 같았다.
나는 꽃이 피어 있는 동안 많은 교훈을 얻었다.
조용한 집안 가족들이 모두 들로 나가고 없을 때 이 장미꽃만이 벗이고 나는 이 유일한 꽃과의 대화에서 무언의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바쁜 농촌이기에 울 안의 잡초를 제거하고 한 그루의 장미나무를 가꾸기보다 밭에 나가 곡식 사이에 풀 한 포기를 더 뽑아야만 유익하다는 현실 앞에서 나는 세수하고 머리 빗고 뜨겁게 더워도 마음대로 일어날 수 없는 조건도 오직 한마디의 불평 없이 주어진 삶을 부여 받아 창조주의 뜻대로 소신껏 피어나는 꽃의 축복이 있기에 적은 기쁨이나마 크게 누리고 조용히 오늘의 삶을 피워보는 생의 근원을 알게 되나 보다. 그래서 올해도 성신강림축일은 오고 다시 한 번 믿음을 통한 생명의 신비를 깨달아야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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