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시간에 찾아오는 손님에겐 달갑지 않은 마음으로 대하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밀린 환자들의 그 기다림이 진료실 밖 복도까지 줄을 서 있기 때문이다. 병원을 보면 세상엔 환자뿐인 듯도 생각된다.
얼마 전의 일이다. 밀린 환자 진료에 여념이 없는 내게「조용히」할 얘기가 있다는 청년이 찾아왔었다. 역시 별로 달갑지 아니했다. 그러나 그 눈빛은「이런 바쁜 시간에 진료상담이 아닌 긴한 얘기가 있을 리 없다」는 내 속단을 눌러버렸다.
진지한 표정에 상기된 눈빛, 단정히 벗어넘긴 머리 사이 가르마가 아주 희여 곧고 강직한 성격을 말해주듯 직선으로 넘어가 있었다. 스물이 갓 넘었을 듯. 어려운듯 한참만에 입술이 열렸다『십여 년 전에 어머니가 시력을 잃었다』그것을 회복시켜 드리는 것이 자식의 도리가 아니겠느냐는 것. 그런 생각을 못해 오다가 요즘 맹인에게 타인의 눈을 이식시켜 광명을 되찾아 준다는 신문 기사를 보고 며칠 밤을 생각다 찾아오게 되었다는 것. 혼자서 출입을 못하시는 어머니를 대할 때마다 가슴은 아픔의 덩어리가 된다는 것. 그의 어린 시절을 되새기면「장님의 아들」일 수밖에 없으며 그런 말 없는 이웃의 조소는 그만 두고라도 암흑의 골목을 더듬고 있는 어머니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겠느냐는 것들이었다.
사연의 결론은 한쪽 눈을 옮겨서라도 밝음을 드리고 싶다는 사나이의 눈물이었다. 효녀심청의 이야기는 알지만 막상 제2의 환자 심청을 마주 바라보고 있노라니 내가 하필 왜 안과 의사가 되었는가 하는 부질 없는 생각마저 들게 되었다.
16년 전, 의대를 졸업하여 전문과목 선택에 골몰하던 때에 정말 우연히 길 가던 맹인과 거리에서 맞부딪친 일이 있었다. 그 복잡한 노상에서 지팡이 하나에 전신을 의지하고『미안하다』는 한마디를 먼저 건네고 사라지는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게 되었다. 그때부터 내 작은 고민은 사라졌고 안과를 택하겠다는 결심이 섰던 것이다. 그것이 주의 계시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뒷모습에서 분명히『맹인에게 빛을… 그것이 너에게 하느님이 주는 빛의 실마리이다』라는 목소리를 환상적으로 들었기 때문이다.
그날부터 내 진로는 정해졌고 암흑의 바다에 나침반이 되고자 오늘날까지 적지 아니한 사람과의 만남을 계속하여 왔다. 그러나 산 사람의 눈을 빼서 이식할 권리와 능력은 주께서 허락하지 않으신다.『아들이라 해도 산 사람의 눈을 옮길 수는 없습니다』라는 내 답변에 그 청년은 스스럼 없이 일어나 되돌아갔다. 그 힘없는 실망 그것은 하루 종일 그날의 일이 내게서 떠나지 아니했다. 그리고 생각하게 되었다.
『주님은 왜 내게 그를 보내셨는가?』그리하여 흰지팡이 보내기운동에 이어 두 번째로 헌안운동의 전개에 나서고자 한 것이다. 성모병원 안은행의 개설 9년 만에 1백여 명에게 광명을 되찾도록 보람은 이뤄졌다. 그러나 안은행이 남의 눈을 돈으로 사고 파는 금전적 거래는 안 하지만 은행이라는 말이 이런 오해를 낳기도 한다.
농담이지만『두 눈을 막 쓰기엔 아까우니까 그냥 두 개를 다 쓸 것이 아니라 하나는 빼어 맡겨 놓았다가 고령에 시력 하나가 나빠지면 그때 끼워 달라』고 하는 우스개 소리까지 나올 정도이니 기가 찬다.
헌안을 결심, 서명한 사람에게서 임종 뒤에 안구를 적출해 내어 이식을 신청하고 기다리는 사람에게 연락하여 빠른 시간 안에 눈의 각막만 이식 수술하는 것이다. 안구 전체를 갈아 끼우는 것도 아니며 검은 자위의 각막만 그것이 혼탁되어서 못 보는 사람에게 바꿔 입히는 것만이 가능할 뿐이다. 이건 카메라 렌즈 앞의 필터가 흐려진 경우 이를 갈아 끼우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런데도 아직 오해가 많다.
『주여 나의 목소리가 얼마나 커져야 당신의 뜻을 바로 그리고 널리 펼 수가 있겠습니까? 어찌해야 그 청년을 보내신 뜻을 제가 널리 펼 수 있겠나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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