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높은 줄만 아는지 치솟던 한낮의 수은주도 잠이 들었는지 잔잔히 흔들리는 성숙의 고요 속에 묻혀버린 밤. 마음과 마음들의 호흡이 가빠진 그곳에나 우리를 승화시킬 만한 타버린 불씨라도 존재한다면 이보다 더 보람된 나날이 어디 있겠는가?
산허리도 폭포처럼 밀리는 밤하늘을 찾아 우이동 계곡을 산책하는 일에 습관이라도 되어버리듯 오늘도 소름이 끼치리 만큼의 시원한 밤바람을 쏘이고 돌아오는 길에서의 일이었다.
막차요 봉천동! 정확히 말해 밤 10시 45분 버스 안에는 다섯 명의 승객과 이틀 만에 귀가하는 운전기사 네 명、안내양 두 명、모두 열두 명이 있었다.
사십 세 가량 들어보이는 B번 운전기사가 출입구에 서서 막차요 봉천동! 신나는 일이라도 생긴 듯 싱글벙글 웃으며 소리를 지른다. 누가 보면 한 잔 거나하게 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정류소마다 문을 열고 닫으며 막차요 봉천동을 서너 번씩 외치는 것이다.
대여섯 정류소를 지나면서부터 손님들이 타고내리는 바람에 붐비기 시작하였다. 손님들마다 요금을 안내양에게 누가 시키기라도 한 듯이 차례차례로 내지를 않는가.
법 없이도 살아갈 사람들、버스 안은 축제를 만난 듯 승객들은 승객 나름대로 함빡 웃음을 머금고 운전기사는 콧노래를 부르며 어둠을 찌르는 불빛을 따라가지를 않는가?
안내양 뒷좌석에 자리를 차지한 후 평소에 지녔던 몇 가지를 물어보았다. 근무 시간이 어떠냐고 대수롭지도 못한 질문을 던졌다. 여덟 시간 근로법을 기준할 수는 없고 이틀 일하고 하루 쉬게 되지만 그러나 동료 중 누구에게 일이 있을 땐 사흘 나흘 대중없이 근무해야 된다는 것이다.
온종일 서 있는 것이 남들 보기에는 상당히 피곤하고 동전에 지치는 것 같아도 요즈음엔 정신적으로 큰 부담<계수기 철거 이후>이 없기에 할 만하다는 것이다. 실질적인 면을 재차 물었을 땐 여자의 수줍음인지 대답을 꺼려하질 않는가?
한 달에 이십 일 평균 근무하면 4만5천 원 정도 남들 보기엔 힘들고 천한 직업을 어떻게 해낼 수 있겠느냐? 고 그 급료를 받고 누가 일하겠느냐고 하겠지요? 그런들 어떡하겠습니까?
부모님 은혜 크게 입은 일 없고 자신의 운이라면 운이 없어 남들 같이 제대로 배울 처지도 못 되고 맡은 이 일로써나 사람으로 태어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찾고 다원화한 사회생활에 일익을 담당하는 것으로 만족해야지요. 때로는 손님들로부터『감사합니다、고마와요、내일 또 만나요…』식의 인사를 받았을 때는 긍지와 보람을 느끼게도 된답니다.
십여 세 아래인 안내양의 말을 들으면서 새삼 삶의 가치와 보람의 기준을 찾아본다. 때로는 비웃음을 야유를 그러나 시민의 봉사자로 성실 근면의 생활에서 자기 나름의 이상과 현실을 추구하지 않는가?
그 힘든 직업에 긍지를 갖고 있지 않느냐 말이다.
막차요 봉천동! 시발점에서 10분 정도 동승했으니 3㎞쯤은 왔을 것이다. B번 운전기사는 대역의 엑스트라로서의 기쁨의 일이 아니라 퇴근길의 기쁨으로 평소 봉사하는 안내양의 고마움에 외쳐대는 것이리라. 다음에 또 기회 있으면 만나요.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스쳐간 일들을 기억해본다. 자기 가정과 직업에 대하여 애착심을 가지지 못할 때가 실의와 회의에 찬 생활이리라. 직업이나 생활환경이 삶의 방편이 아니라 목적일 것이다. 일을 할 수 있다는 것、그것도 보람을 갖고 오늘을 산다는 것이 삶의 궁극적인 가치이며 행복일 것이리라.
행복과 불행、만족과 불만족의 생활이 직업의 종류나 환경의 차이 때문만은 아니리라. 일상생활의 마음가짐이 어떻느냐에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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