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토요일, 모처럼 일찍 귀가했더니 병원에서 전화가 왔는데 생후 며칠 안 된 아기를 안고 온 한 여인이 날 찾는다는 원무과 당직의 전달이었다.
전연 겁낼 일이 없는 나로서는 아내가 어떻게 생각할까- 혹시 오해는 않을까 속마음으로 근심하면서 어정쩡한 일요일 하루를 보냈다. 하필 안과 의사인 내게 꼭 할 말이 있다는 사연은 한국가톨릭의사회에서 미혼모 기아구호사업을 벌인다는 소식을 아는 어느 지방 수녀원의 수녀가 가르쳐 준 대로 신문 쪽지에 난 내 이름을 들고 먼 길을 찾아와 기다린 생면부지의 미혼모였다.
너무나도 어이없는 일이었으나 처지가 딱해 보여 H양자회에 겨우 알선해준 일이 있었다.
가톨릭은 모자보건법의 제정을 반대해 왔다. 그것은 생명을 죽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증가일로에 있는 미혼모 문제를 가톨릭의사회가 외면만 할 수는 없는 처지이다. 그래서 2년 전에 미혼모와 기아구호의 사업을 벌인 적이 있었지만 예산이 편성된 가톨릭구제회 기구가 없어져버려 구호사업도 유명무실하게 되고 말았었다.
요즘 정부가 마련하려던 모자보건법의 성안이 가톨릭의 반대 등에 걸려 다시 후퇴하게 되고 여당은 그 대신 형법 속의 낙태 규정 처벌 조항을 완화해서 새로운 법 제정과 동일한 효과를 기대한다고 보도되었다.
여기서 다시 생각해 보자. 임신된 태아는 숨 쉬고 있는 한 생명체이다. 미국에선 주에 따라서 특정한 주만이 낙태를 허용하는 곳도 있지만 그것도 73년 1월 25일 미 연방 대법원이 내린 판예대로 임신 7개월 이전까지만 그나마 허용하고 있을 뿐이며 온 미국이 다 허용하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면 비미국인이나 관광객이 원인구보다 늘 많은 하와이주가 허용하고 있다. 그전까지는 하와이에서 일부러 낙태를 위해 동경에까지 와서 수술을 받았는데 이런 것을 막고자 하는 의도가 더 큰 것이었다. 그런데도 흔히 미국은 낙태의 천국쯤으로 잘못 알고 있고 미국의 성의 방종은 우리나라를 뺨 칠 정도로 알고 있으니…이것은 나의 존스ㆍ홉킨스 의대 수학 시절 경험으로 봐서 코끼리 다리일 뿐인 것이다.
어쨌거나 우리나라에도 미혼모가 격증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렇다면 인공임신중절을 반대하는 가톨릭 의사의 위치에선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누구도 인간이 인간의 생명을 죽일 수는 없다. 어떤 형태이든 생명은 마찬가지니까.
그러니 미혼모와 기아구호사업을 다시 펴야만 하겠다. 그것밖에는 없다. 우선 미혼모가 더 생기지 않도록 계몽에 치중할 것을 제1로 하고 이런 캠페인에 병행해서 미혼모는 가톨릭병원이 맡아 비밀 보장의 진찰을 해주고 해산은 경우에 따라서 무료 입원으로까지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산모의 건강을 보호하고 위험스런 임신중절을 막고 새로운 생명을 구하는 외길일 뿐이다.
해산 뒤에 분만된 영아는 미혼모의 의사에 따라 결정하되 원하지않는 경우 복지사업회나 양자회를 통하여 입양시키는 길을 알선해 줄 수가 있는 것이다. 근래 우리나라에선 한 해에 수천 명까지 나간 일이 있다. 그것이 살인(인공유산)보다야 훨씬 낫지 아니한가.
로마 교황청의 74년 6월 25일 인공유산 자유화 반대 방침에 따르는 것만이 아니라 만일 인공유산이 합법화된다면, 오늘의 성도덕과 사회 윤리는 걷잡을 수 없이 혼란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악을 조장하는 법률은 다른 모든 법률까지 타락시키고 마침내는 법치국가의 바탕을 무너뜨릴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가톨릭 교회는 미혼모 기아구호사업을 위한 기본 마련에 다 함께 나서 줘야만 하겠다.
도덕의 둑을 막은 네델란드의 맨주먹 소년으로 가톨릭은 빠짐 없이 막고 나서야「가톨릭의 반대」의 현실적 모순이 사라지게 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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