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친구가 한국구경을 왔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둘러보고 어디가 제일 좋더냐고 물었더니 『아파트 단지가 가장 인상적이더라』는 것이었다.
이 속된 친구 같으니라구. 설악산도 경주도 다 두고 하필이면 아파트단지냐! 고층 아파트는 세계 어딜 가도 있지마는 한국처럼 한 자리에 10층이 넘는 고충 빌딩이 끝도 없이 저렇게 모여 있는데는 없다는 설명이었다. 그리고는 한국의 경제성장을 극구 찬양하는 것이었다. 듣고 보니 과연 놀랍다. 사람이 사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토끼장에 사람을 넣어 끝도 없이 진열해놓은 것 같다.
저 빌딩 하나가 옛날의 한마을의 인구라면 몇 십, 몇 백의 마을들을 더 가까이 한자리에 모아놓았으니 그 인간관계가 얼마나 서로 친밀해졌겠으며 서로의 내왕인들 얼마나 쉽겠느냐 싶어지지마는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단지에서의 생활에는 이웃사촌이 없어진지 오래다. 이웃이 싫고 사람이 무서워서 아파트로 옮겨가서는 제마다 자기집 문을 걸어 잠그고 달팽이처럼 도사리고 앉아 벽 하나 바깥은 다른 세계, 나와는 관계없는 인종들의 세상이다. 아파트에서 혼자 사는 노인이 죽었는데 아무도 모르고 있다가 3개월 후에 하도 악취가 심해서 열어보니 죽어있더라는 외신기사가 이제는 놀라운 이야기가 아니다. 어디 그뿐인가. 우리 피 속에는 적혈구·백혈구·코레스테롤이니 하는 것들 외에도「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유전인자가 들어있다. 남이 행복하면 공연히 속이 뒤틀리고 이웃이 실패하면 어쩐지 속이 후련한 그런 인생을 우리는 살고 있다. 얼마나 추한 꼴이냐. 사랑이 없는 세상이다. 조상들의 유일한 유산인 인정마저 버린 지 오래다.
이점은 본당에서도 마찬가지다. 본당이 얼마나 오랜 세월 하느님의 백성에게 그 생활을 윤택하게 했던고. 사업과 교육과 여가의 장소였던 옛날의 본당이 그립기만 하다. 오늘의 본당은 그 구성부터가 너무 거대하다. 더 작은 가족적인 본당으로 세분되어야 하겠다. 그밖에도 교우들의 빈번한 주거의 이동. 대도시의 소위 익명성(匿名性)등으로 인하여 오늘의 본당은 신앙공동체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종교집단에 불과하다. 교우끼리 서로가 서로를 모를 뿐만 아니라 관심마저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관심이 없다는 말은 곧 사랑이 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씩 주일날 아버지 앞에서 만난다. 부모님의 생신이나 제삿날처럼. 여기는 사회적, 경제적 지위나 상하가 없다. 형제들이 모인 곳에는 따질 것이 없다. 모두 같은 한 형제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본당을 신식말로 공동체라고 한다.
공동체란 서양말 꼼뮤니띠의 번역인 것 같다. 서로 사귀고 마음과 몸이 왔다 갔다 할 뿐 아니라 「같이」「한다」는 뜻이다. 서양 사람들은 또 예수님을 우리 몸에 모시는 영성체를 꼼뮤니온이라고 한다. 본당 공동체는 성체가 중심이다. 「성체가 교회를 만드는 것처럼 성체를 만드는 것은 사실은 교회다」이 말은 프랑스의 저명한 신학교수 드류발 신부가「교회에 관한 묵상」에서 한 말이다. 본당에 모인 우리가 바로 예수님의 교회 일 때 우리는 성체를 떠나 어떤 공동체도 생각할 수 없다. 제단을 중심으로 모인 우리는 형제들과 함께 미사전문에 있는 그대로 『기쁨과 평안과 광명 속』에서 예수님이 찾아주신 한 아버지와 같이 지내기 위함이다. 바오로사도는 본당공동체를 예수님과 생명을 같이 하는 팔·다리요 예수님과 한 몸이라고 설명한다. 이보다 더 한 형제가 세상에 또 있겠는가.
본당마다 「주보」를 나누어준다. 편리한 인쇄물이다. 강론 교구소식 본당소식, 심지어 교무금 주일헌금의 액수마저 소상하다. 그러나 형제들의 소식은 한자도 적혀있지 않다. 누가 죽었는지 입원을 했는지 수술을 했는지 혹은 결혼을 했는지 아니면 밥을 굶고 있는지 알리지도 않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외인들도 만나면 안부를 묻고 악수를 하는데 예수님의 형제는 서로 안부를 묻는 법이 없다. 미사 중에 성체 앞에서 평화의 인사를 한다. 『진심으로 축하합니다』앞도, 뒤도 양옆도 통성명을 한 일이 없다. 얼굴은 생면부지다. 모르는 사람에게 인사를 하면 이상하게 쳐다본다. 여러 사람에게 같은 짓을 하면 정신병원을 연상하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는 과연 형제들을「내몸같이」사랑하는가. 예수님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한 바오로사도는 로마 교우들에게『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기뻐해주고 우는 사람과 함께 울어주라』고 당부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두 번 울으셨다고 적혀있다. 그의 친구 라자로가 죽어 초상을 치루고 난 뒤 그 누이와 친구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셨고 (요한) 군중들의 열광적 환영 속에 입성한 예루살렘이 하느님의 은혜로운 구원을 거부하다가 멸망하여 많은 사람과 그 자녀들이 학살당할 것을 예언하시며 눈물을 흘리셨다(루까). 예수님은 자기를 위하여 눈물을 흘린 적이 한 번도 없다. 언제나 남들, 이웃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셨다. 그런데 예수님이 너희들이 성당에 모였길래 『내 기쁨을 당신들도 같이 나누고 마음껏 누리게 해주었는데(요한) 너희들은 기쁨은 커녕 심각한 얼굴로 형제끼리 인사 한마디 없이 뿔뿔이…』하시며 제대위에 외로이 남아 눈물을 흘리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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