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문명은 날이 갈수록 인간 생명을 경시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누구를 위한 문명이고 무엇을 위한 우리의 삶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처하고 있다. 먼 곳의 것은 그만 두고 우리나라의 경우만 보자. 정부는 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마치고 4차 계획을 발표하면서 80년대의 번영과 지금까지의 눈부신 경제 성장을 자랑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10대 청소년의 범죄 증가와 흉악화가 수반된 경제 발전이었다.
국민이 먹는 음식에 화공 약품을 사용해서라도 돈벌이를 하겠다는 무자비한 양심, 커피에 담배 꽁초를 섞어서 팔아도 가책 받지 않는 양심, 교통사고로 무수한 생명을 짓밟고도 무책임한 운전사와 불량 차량이 범람하는 사회, 이 모든 것은 무엇을 뜻하고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오늘의 어른은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잘못된 가치관과 도덕 교육의 부재(不在)를 개탄하고 있다. 한마디로 인간이 인간을 존중하려는 마음과 양심이 죽어버린 사회 현상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생명을 죽이고 해치는 행위에 대해서는 모두가 경악하고 어른이 경종을 울리고는 있지만, 보이지 않게 살해되는 생명에 대해서는 어른이나 국민 양심은 무감각하다.
생명 자체가 존중한 것이라면 어떠한 인간 생명도 존중되고 보호되어야 한다는 사리(事理)가 자명(自明)하건만 그것이 동하고 있지 않는 곳이 바로 우리 사회다. 그 대표적 현상이 바로 우리나라의 낙태풍조다. 모체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태아를 살해하는 것쯤은 이미 세상에 태어난 생명을 살해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판단이라 국가 형법은 이러한 행위를 형법으로 단죄하고서도 국민 다수가 자행하고 있고 그렇게라도 해서 인구억제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 형법을 고치겠다는 실정이다. 인간 생명을 존중하고 양심과 도덕을 선도해야 할 정부까지도 태아 살해쯤은 무방하다는 편으로 기울어진다면 어떠한 원리를 가지고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인구 억제가 생명 평가의 기준이란 말인가? 아니면 생명체가 모태 안에 있느냐, 모태 밖에 있느냐에 따라서 생명의 존엄성을 판단하겠다는 말인가? 만일 사람의 생명을 물리적(物理的) 기준에서 다룬다면 윤리 도덕을 운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양심과 도덕은 물리적 차원(次元)에 속하는것이 아니고 정신적 가치 차원에 속하기 때문이다. 어제는 태아 살해가 살인죄가 되고, 내일은 죄가 되지 않는다는 그런 도덕을 누가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어제까지는 거짓말은 잘못이었지만 오늘부터는 잘못이 아니다 하고 가르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 웃지 못할 도덕적 넌센스가 아무렇지도 않다면 나라의 장래는 실로 암담하다. 만일 인구 감소가 도덕적 가치라고 본다면 살해 범죄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만일 생명의 기준이 모태와 모태 밖에 따라 다르다면 어른의 생명과 어린이 생명의 차이는 어떻게 다를 것인지가 자못 의심스럽다.
오늘의 청소년 범죄를 막기 위해서 각종 선도책이 강구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인간 생명이 왜 존귀한 것인지를 도덕적 차원에서 기성세대 자신부터 알아야 할 줄 안다. 부모들은 태아의 살생을 예사로 여기면서 청소년들에게 생명이 존귀하다는 것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 인간 생명을 해치는 온갖 사회악을 제거하기 위해서 인간 생명이 얼마나 존귀한가를 국민 모두가 자각할 수 있게 하는 도덕적 교육이 경제 계획 이상으로 중요하게 정책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그리스도교적 생명관은 이러하다 조물주 하느님을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 인정하는 동시에 인간 생명만은 육체적 생명과 함께 영원한 하느님 생명에 연결된 존재로 본다. 하느님의 생명에 영원히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이기에 그가 신앙인이든지 아니든지 지상에서는 최고로 존귀한 존재라고 인정한다. 그리고 인간 생명체라면 모태 안에 있거나 밖에 있거나 어른이거나 어린이거나 쓸모가 있거나 없거나 인구가 많거나 적거나 유색이거나 백색이거나 구별 없이 다 같이 하느님 생명에 초대 받은 존재라고 생각하고 존중한다. 더 나아가 하느님을 생명의 세계에서 아버지라고 생각할 때 이유는 다 같은 형제라고 생각해서 서로 존중하고 또 사랑해야 할 근거를 인식한다. 이러한 세계관과 생명관을 바탕으로 해서 도덕율은 인간의 살생(자살까지도)은 최고악이라고 단죄하고, 생명에 해를 끼치는 일체의 행위를 단죄하는 것이다. 사회의 온갖 부정, 인권 유린 같은 것을 규탄 반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얼마니 숭고하고 견고한 생명관인가!이러한 바탕을 상실한 생명관은 언제나 현세주의나 물질주의에 지배되어 인간 생명의 경시 풍조로 전락되기 마련이다. 바로 오늘의 정신 풍토가 그런 것이라고 생각된다. 끝으로, 이러한 상황 속에 살고 있는 크리스탄들은 인간 생명을 존중하는 증인들이 되어야 하겠다. 정의와 인권을 부르짖기 전에 생명의 존귀함을 알려주는 시범자가 될 때 정의와 인권의 호소도 함께 받아들여질 것이다. 특히 크리스찬들은 태아 살생의 풍토에 역행하여 생명의 보호를 위해 앞장서 주기를 절실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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