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던 비가 초근히 내리는 아침이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편지들의 답을 쓰려 앉으니 문득 남쪽 창 너머로 시선이 당기면서 어떤 신부님의 말씀을 더듬어 본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기도보다 중요하지만 기도 없이는 사랑의 실천이 어렵다. 바빠서 기도시간을 줄여야 한다는 것은 안 될 말, 한 시간의 기도를 바빠서 제대로 못하는 사람은 두 시간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바쁜 그만큼 기도의 밑거름이 더 필요하니까요』
바쁘다는 말과 바쁜 척하는 버릇은 없애야겠구나 하면서 이 시간만이라도 고요를 차지해 보고파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언제나 보는 창, 늘 있었던 나무들이건만 유난히 맑고 곱게 보인 것은 밤부터 내린 비로 말끔히 씻긴 까닭만은 아닌가 보다.
눈 앞에서 펼쳐진 나무들의 모양과 푸른 빛이 이렇게도 잘 어울릴까. 지붕 위로 치솟은 히마라야송은 넓게 사방으로 가지를 뻗치고 짙푸른 잎에 두 발을 굳게 딛고 선 훤칠한 장군의 모습, 연초록 잎으로 알맞게 단장한 으능나무 큰 키에 척척 느러진 가지를 다소곳이 감추고 있는 수양버들, 넙쩍넙쩍한 잎으로 자연 파라솔인 양 버티고 있는 벽오동, 익기까지는 서너 달이나 남은 꼬마 열매나마 고이 덮어 간직하고 있는 엄마 같은 감나무, 나즈막하게 읊조린 개나리, 옹기종기 반짝이는 둥근 잎들이 사이좋게 속삭이듯이 다듬어진 사철나무 어느 한가지도 같은모양 같은색깔이 아니다.어쩌면 이렇게 제나름대로 아름답고 어울리는 것일까.조물주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후「좋다」고 하셨을 만하다. 이렇게 나무 새 짐승 곤충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와 크기 빛깔들이 다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조물 중의 걸작품인 사람은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옷차림을 하고 있는지? 난 이에 대한 연구가도 아니고 미학도 모르는 처지이지만 사람이 옷을 입는 것은 자기 보호도 있겠지만 남을 위한 쪽이 더 짙은 듯하다. 키나 몸매나 얼굴 빛에 따라 색깔 무늬 모양들을 골라 되도록이면 어울리게 아름답게 멋있게 돋보이게 하려는 것도 이 때문일 테니 그런데 가끔 극단적인 미의 추궁?으로 남에게는 불쾌감을 주는 때도 있다.
어느 토요일 열차 속에서의 일인데 주말이라 붐비는 차 속엔 좌석권이 없는 손님이 쭉 늘어섰다. 이럴 땐 앉은 사람도 마음이 편치 않다. 세 사람씩 앉기로 하여 바로 옆의 아가씨가 초대되었다. 고맙다고 지극히 만족스런 표정으로 끼어앉은 것까지는 좋았지만 잠깐동안 얌전히 있더니 퍼붓는 잠을 못 이긴 듯 꾸벅거리기 시작, 소매 없는 원피스에 머리엔 기름이 지르르, 서울 간다고 최고 단장을 한 모양이다. 가뜩이나 숨 막히는 더위에 땀이 찍찍한 팔은 옆의 흰 웃도리를 입은 신사의 소매에 기름 머리는 그 어깨에 아주 의지하여 깊은 꿈나라로 들고 마니 육중한 몸무게와 맞닿은 열기에 더위는 극도에 달한 듯 그분은 찌푸린 이마로 딱하다는 눈치만이지 말이 없다.
어지간히 점잖은 분인가 보다 생각은 하지만 아무도 그를 깨우질 않는다. 한숨 잘 자고 깬 아가씨는 지난 밤에 못 잤다는 변명만 하고는 잠든 때의 일은 전연 알지 못하고 태연한 것이 얄밉기도 한 눈치. 한더위에 소매 없는 옷을 입는 게 흠은 아니로되 집 안에서나 자가용이면 몰라도 좁은좌석에서 몸이 서로 닿는 여행시엔 삼가야 할 듯. 언젠가 이런 옷차림의 아가씨는 성당 출입을 금한 때도 있었는데 역시 남을 위해서였을 게다. 선의의 피해자가 없어야 하니까. 이젠 남까지 시원하게 하는 저 앙상한 모시 치마 적삼이 그립기도 하다. 더위에 접어들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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