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교회의 안팎에서는 고문에 관한 문제가 단군(檀君) 이래 처음으로 심각히 논의되고 있다. 이 논의의 계기는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노동현장에 뛰어들었던 한 여성에게 가해진 성(性)고문 사건이 알려지자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정의를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에 항의를 하게 된 것이다.
물론 고문과 관련된 사건이 문제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고문이라는 공권력의 횡포가 한국 사회에 있어서도 빈번히 일어나고 있었으나 이에 대한 근본적 대책은 마련되지 못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의 사건은 종전부터 알려져 왔던 일반적 고문의 형식과는 달리 한 여성을 파멸시킬 수도 있는 성(性)고문이었다는 데에서 그 파렴치함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 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더욱 강하게 일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느님이 자신의 모상을 따라 창조한 인간은 피조물 가운데 가장 존귀한 존재이며, 이러한 인간의 존엄성은 어느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에게 가해지는 고문은 공권력에 의해 인간의 존엄성이 유린되고 모독 되는 사례의 극치인 것이다.
그러기에 교회에서는 고문행위를 단죄해 왔으며, 고문은 고문을 당하는 사람을 파멸시킬 뿐만 아니라 고문하는 사람자신도 파괴시키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범죄행위로 규정했다. 또한 고문자체를 단죄하고 있는 교회는 고문에 대한 항의를 인간의 자연법적 권리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교회는 고문행위 그 자체와 함께 고문이 자행되는 상황에 대해서도 무관심할 수는 없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가치부재와 정신적 공백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가르침에 따라서 이번의 부천사건에 대해 우리 교회는 자신의 입장을 밝히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서울대교구의 정의평화위원회에서는 성명서를 발표했고 한국여자수도회 장상연합회에서는 서울명동대성당에서 기도회를 개최했으며, 이 미사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이번의 사건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분명히 밝혀주었다. 그리고 경기도 부천의 심곡동 성당에서도 이에 합의하는 기도의 모임이 열렸던 것이다. 이는 암울한 이 시대를 사는 사람으로서 겨레와 나라의 진정한 발전을 기원하는 그리스도인(人)의 양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제 국회에서도 부천경찰서에서 자행된 성(性)고문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에 착수하였다.
이에 우리는 이번의 사건을 계기로 하여 공권력의 횡포에 분노하기 보다는 이와 비슷한 사건의 재발을 방지할 수 있는 방안도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인간성에 대한 모독인 고문 특히 여성에 대한 파괴행위이며 준 살인행위(準 殺人行爲)라고도 할 수 있는 성(性)고문과 같은 사건이 다시 재발되어서는 아니 되기 때문이다. 앞으로 고문이라는 공권력의 횡포가 제거되고 방지되기 위해서는 먼저 이사건의 진상이 철저히 규명되어야할 것이다. 우리는 사건이 침소봉대되기를 원하지 않고 뿐만 아니라 이를 은폐하거나 왜곡축소하려는 행위도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사건의 진상을 철저히 규명하여야 인간성에 대한 모독의 재발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므로 인간의 존엄성을 드높이려는 우리는 이러한 주장을 하는 바이다.
그리고 고문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하여 이 사건의 책임소재에 대한 철저한 추궁이 요청된다. 고문행위의 하수자뿐만 아니라 이를 용납묵인한 사람들에 대한 책임까지도 규명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사건의 피해자에 대한 적당한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고문의 진상을 규명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는 고문행위자에 대한 처벌과 고문피해자에 대한 보상은 자연법(自然法)이 요구하는 최소한의 정의인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와 유사한 사건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형법(刑法)내지는 형사소송법(刑事訴訟法)의 관계 조항을 대폭 강화시키기를 제안한다. 물론 현행 헌법 제11조 2항에서는 고문을 금지하고 있다. 그리고 형법에서도 가혹 행위자에 대한 처벌규정을 두고 있으며 형사소송법에도 고문을 방지하기 위한 규정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반규정들이 실효가 거의 없음이 이번 사건을 통해 드러났다. 그러므로 고문방지를 위한 법규들은 더욱 강화되어야 할 것이며, 법 규정의 정당한 적용을 위해서도 배전의 노력이 요청된다.
고문방지에 관한 법규들을 사문화시키지 않고 올바로 적용하려는 새로운 자세가 요청되는 것이다. 우리는 법이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정의를 보호하는 보루로서 존재해야 한다는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에 따라 이와 같은 제안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와 같은 사건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도덕성을 회복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기반으로 한 올바른 가치관을 확립해 나가야 할 것이다.
만일 출세주의, 업적제일주의가 지배하는 관료사회의 풍토가 존재한다면 인간의 존엄성은 언제나 무시될 수 있을 것이므로 이를 극복하고 올바른 가치관을 확립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교회는 그 동안 도덕성의 회복과 가치관의 확립을 역설해 왔다. 고문과 같은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범죄행위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자세에 근본적인 전환이 필요한 것이며 새로운 회심(回心)이 요청된다고 하겠다.
이번 사건의 피해자에게 위로를 전하며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고문과 같이 인간 존엄성에 대한 모독이 다시는 이 땅에서 발생하지 않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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