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1일부터 8일까지 미국이「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제41회 국제성체대회에서는 모든 크리스찬은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구하자고 외쳤다. 현재 지구상에는 3분의 2 이상의 사람들이 굶주리고 헐벗고 집이 없고 건강을 잃고 일자리가 없고 희망이 없이 살고 있으며 이는 20세기의 큰 수치라고 하였으며 모든 크리스찬은 그 해결을 위해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이 대회에 교황 특사로 파견된 성사경신성 성장관 제임스ㆍ녹스 추기경은『하느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부여받은 우리는 인류 가족의 굶주림을 해소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천명하였다.
과학의 풍요를 자랑하고 있는 현대에 살고 있는 인류의 3분이 2 이상이 굶주리고 헐벗고 있다는 것은 큰 이변이 아닐 수 없다.
과학에 의존하는 현대가 과학의 풍년을 만난다고 하더라고 그것이 인간 사이의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일과는 관계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보는 눈과 인간생활을 점점 기계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대의 가장 심각한 결핍은 의식주와 함께 사랑의 굶주림이라고 할 것이다.
그래서 오늘의 교회가 특히 각성하고 강조해야 할 긴급한 사명은 바로 이 세상에 진실한 사랑을 심는 일이다. 하느님은 곧 사랑이기에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크리스찬은 제 이웃에서부터 모른 인류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미소한 자 중 한 사람에게 베푸는 것은 곧 나에게 베푸는 것이니라』고 하였고『내가 당신들을 사랑한 것처럼 당신들도 서로 사랑하시오.
당신들이 서로 사랑하면 이것을 보고 세상 사람들을 당신들이 나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과연 이웃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이고 또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도 거짓이다.
우리나라에서도「불우이웃돕기운동」을 크게 벌이고 있고 이 사회에는 자선사업 단체가 많다.
그러나 그 성과는 오늘의 세계적 굴주림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음은 물론 가까운 이웃에 대한 문제도 아직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는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또 그 문제는 교회만이 가르칠 수 있는 것임을 헐벗음을 돕는 일은「자신」이 아니라 바로「의무」이다.
그런데도 세상에는 이 의무와 자선이 크게 흔동되고 있다. 또한 크리스찬의 자선은 어떤 조직된 사회나 그 공동체를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그 대상으로 삼는다는 데 있어서 국가적 또는 사회적 자선과 다르다. 즉 교회의 자선은 어떤 조직된 사회나 공동체를 초월하고 어떤 인종이나 민족이나 국가를 초월하여 하느님의 모상을 가진 모든 인류를 그 대상으로 삼는다.
또한 그 자신은 어떤 국가적 또는 사회적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 성자를 보내어 십자가의 피 흘림으로 인류를 구원한 하느님의 사랑에 참여하고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함으로써 이 땅의 인류 구원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의와 자선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정의는 직접 하느님과 그 하느님에 의존하는 사람들의 질서이고, 자선은 직접 이 지상의 인간 공동체의 선을 실현하기 위한 사랑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의 근원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나오고 또 서로 도우지 않으면 그 목적의 실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하느님에 대한 신앙 없이는 진실한 형제애가 나올 수 없고 그런 사랑을 결한 자선은 언제나 어떤 제하된 사회 내에서의 상부상조나 사회적 연대의식에서 남을 돕는 일 이상의 것을 생각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이와 같은 교회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혹은 외면하고 있다. 이 말은 곧 현대 교회가 현대 사회를 교도할 힘을 갖추지 못하였거나 또는 잘못 가르쳤다고 할 수 있다. 현대 사회의 복음화는 교회의 솔선수범만으로 가능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의 크리스찬은 깊이 반성하고 자각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교회 안에는 특히 옳음과 사랑에 굶주린 자뿐 아니라 빵에 굶주리고 헐벗은 자들이 많이 찾아온다.
우리는 우선 같은 형제인 그들을 얼마나 도우고 있는가. 한 교구 한 본당의 일 년 예산 속에 불우한 이웃을 돕기로 배정한 예산이 그 총 예산의 몇분의 일이나 되는가. 본당을 운영하고 남은 예산으로 하는 자선이 과연 옳은 자선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만약 교회가 그 굶주린 자들을 도우기는 커녕 오히려 교구금이나 헌금을 무리하게 요구한다면 그들이 위로받을 곳은 어디일까.
굶주린 자가 굶주린자를 도우는 일은 매우 어렵다. 그러나 그 속에도 사랑과 자선이 있어야 한다는 데는 변함이 없다. 사랑이 있으면 굶주린 자를 먹을 것이 있는 곳으로 인도할 수도 있고 적어도 그들에게 마음의 위로를 줌으로써 그 고통을 덜게 하고 용기를 일깨워 줄 수도 있다. 인간에게 가장 많은 것을 준 자는 억만장자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다.
끝으로 모든 위정자들에게 그 치하에 있는 굶주린 백성들이 사회 보장 등과 같은 제도적 도움을 받게 하고 이 땅에 편재하고 있는 모든 자원은 하느님이 모든 인류의 완성을 위하여 준 것임을 깊이 깨달아 이 지구상에서 굶주림을 해결하는 데 앞장서 주기 바란다. 자기만의 이익을 위하여 또는 제 나라만의 이익을 위하여 그 편재하고 있는 자원을 독점하려고 하기 때문에 싸움이 있고 전쟁이 일어나고 또 그 전쟁을 위해 그 자원을 낭비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을 직시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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