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열세 살 때였다.
재산과 아버지와 오빠、그리고 귀한 집 자식의 권위를 한 순간에 빼앗기고 인생의 말단으로 떨어진 극악의 상황 그 6ㆍ25라는 전쟁의 여름철이 지나갔다.
주치의와 간호원의 손끝에서만 연명되던 어머니를 모시고、두 살부터 열 살까지의 다섯 여동생의 맏언니로서 나는 갑자기 한 가족의 가장이 되었다.
두 살박이 막내 동생은 어머니의 입 안을 엄지손가락으로 후벼내서 어머니 몫의 수수개떡을 제 입으로 가져가곤 하였다.
나는 장바닥에 판대기 하나를 놓고 성냥 한 통을 열 갑으로 나누어 팔아 두 갑어치를 버는 소규모로「담배장사」를 하였다.
그해 12월 6일 그날따라 거리엔 유엔군이 많이 나다녔다. 내일이면 압록강 전선으로 투입될 병사들이라고 하였다.
그 중에는 머리가 오글오글한 순종 검둥이들이 가장 많았다. 내가 좌판을 걷고 귀가하려 할 때였다. 몇 시간째나 시장 어귀 골목에서 나만 바라보며 수근거리던 흑인 병사와 한국 청년이 나를 따라왔다. 베이지색 카키복에 파카 코트를 입고 벨트를 맨 한국 청년은 내가 정상적인 생활을 하던 때에 만났더라면 당장 사랑에 빠질 그런 용모와 빛나는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흑인은 메고 온 북청색의 긴 자루를 열고 그 안의 물건들을 쏟아놓았다. 레이숀 상자 속의 고기와 건빵 그리고 누런 색의 군인용 독구리 쉐타였다.
마지막 후방의 밤과 낭만을 함께 할 사람으로 거리를 종일 헤매다가 결국 나와 나의 가족을 택하였다는 것이었다. 기쁘고 그러나 슬픈 시간이 빨리 지나가고 그들의 귀대 시간이 다가왔다.
그 흑인은 십자가가 달린 금빛 목걸이를 어머니 목에 걸어드렸다.
미국에서 올 때 아내가 꼭 살아오라고 말하며 목에다 걸어주었다면서 그는 코멘 소리를 하였다. 성호를 긋고 또 긋고 하였건만 나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 턱이 없었다.
그 잘 생긴 한국 청년은 가슴 속에서 성경책 한 권을 꺼내어 나에게 주며 이렇게 말하였다.
『다음에 성당엘 다니게 되거든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져라. 나는 대신학교 4학년생이고 나의 삼촌은 신부님이란다. 이 책을 자주 읽어라. 네가 이 책을 하루에 세 번씩 읽으면 나는 아주 건강하게, 두 번씩만 읽으면 조금 다쳐서, 한 번씩 읽으면 많이 다쳐서 나는 돌아온다.
아주 잊어버리고 안 읽으면 나는 죽어서 영혼이 돌아와 마리아를 보호해주마.』
나는 세 번이 아니라 열 번이라도 읽는다고 약속하였다.
진정으로 하였다. 그는 내 손목을 꼭 잡고 미군 부대 문 앞에까지 함께 갔다.
그리고 거기에서 차에 실려 압록강 전선으로 떠나갔다.
어두운 분위기에 싸여 한 달이 흘러갔다.
해가 바뀌고 눈이 천지를 덮었던 1월 4일. 시내는 텅 비었고 여자들만의 우리 식구는 갈 곳이 없었다. 겨우 먼 친척이 있는 무네미 마을을 생각해내고 우리 일곱 식구가 맨손으로 피난길에 나섰을 때에는 피난민의 대열은 앞에도 뒤에도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퍼붓는 눈발이 동생을 업고 힘에 겨워 열이 오른 내 뺨을 때렸다.
걷는다기보다는 차라리 뒤로 밀리어 간다고 표현해야 옳을 우리 가족이 무네미가 내려다보이는 산꼭대기에 이르렀을 때 이미 쌓인 눈은 발목을 넘었다.
우리는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밤이 되었다.
그대로 눈이 내린다면 눈이 우리들의 머리 위까지 덮을 것이었다.
그때 나의 연약하신 어머니께서 조금도 슬퍼하는 표정 없이 말씀하셨다.
『우리 모두 여기 누워서 자기로 하자、아침이 되어 해가 뜨면 눈이 녹겠지』
나는 내 생애를 통해서 이때만큼 깊이 어머니를 신뢰했던 적이 없다.
나는 곧 깊은 잠에 빠지었다. 아침 햇살을 받고 눈을 떴을 때 나는 보았다.
밤새껏 무릎을 꿇고 기도하신 어머니의 얼굴 위에 흐르던 환희와 감사의 눈물을…
그분의 합장한 열 손가락 사이에는 검둥이가 주고 간 금빛 십자가가 대롱거리며 햇살을 받고 빛을 뿜었다.
그때서야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눈 덮인 밤을 산꼭대기에서 보내고도 우리 연약한 일곱 사람이 어디 하나 아픈 데 없이 살아남기 위하여서 그 흑인 병사와 미남의 신학생이 대신 죽었으리라는 것을.
그분이 주고 간 성경책을 읽기에는 내 몸이 너무도 지쳐 있었으니까.
나는 그들의 이름을 모른다. 단지 오글오글 흑인의 곱슬머리와 그 아름다운 신학생의 눈빛만이 지금도 내 눈 앞에 생생하게 살아있다. 그리고 내 손을 꼭 잡았던 그 따스한 감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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