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과 같이 인간이 소외되고 물질과 기계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시대에 살다 보면 우리는 때때로 고독과 회의에 잠기기가 일쑤다.
돈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속보다 겉이 소중시 되는 상황에서 홀로 자기가 참다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를 묵상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닌 것 같다.
나는 가끔 어린 아이가 어머니나 아버지에 대해서 느끼는 흐뭇한 감정과 그 티끝 없는 표정을 관찰해 본다.
어린이들은 부모나 어른이 주는 것을 안심하고 그저 기쁘게 받아들이기만 한다. 거기에는 추호의 의심도 불안도 없다.
그 반면 성숙한(?) 어른들은 의심과 불신 속에서 타인의 사랑과 도움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 많은 것 같다. 이와 같은 아이들과 어른의 차이는 과연 어디에 그 원인이 있겠는가.
어린이들은 신앙은 없지만 신뢰심이 있는 반면 어른들은 신앙은 있어도 신뢰심이 없는 탓이 아닐까?
남을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에 대하여 우리는 관념적으로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실천하는 데에는 참으로 인색한 것이 사실이다.
신뢰나 신앙이 모두 믿음이라는 개념 속에 내포되는 감정인데 신앙은 있으면서도 신뢰하지 못한다는 것은 정말로 기이한 일이다.
혹자는 그 이유를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절대자인 고로 믿을 수 있지만 인간은 불완전한 피조물이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물론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는 우리의 신앙에 틀림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하느님은 많은 복음에서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셨고 이것이 바로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상통한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하느님에대한 우리의 믿음은 하느님에대한 사랑의 소산이며 결과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웃에 대한 신뢰와 사랑으로서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구체화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결과가 된다는 것을 논리의 비약이라고만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인간은 누구에게도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선의(善意)와 양심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이 가질 수 있는 특징과 장점이 부여되고 있다.
그러한 좋은 점을 발견하고 인정하고 그것을 믿어주는 것이 곧 하느님의 뜻에 가장 합당한 신앙적 응답인 것이다.
따라서 자기의 양심과 선의와 장점만을 강조하고 타인의 양심 선의 장점을 멸시하고 경시하는 것은 신뢰심 없는 신앙심을 가진 탓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린 아이와 같은 신뢰 즉 어머니에 대해서 느끼는 어린이의 완전한 의탁 속에서 참다운 행복이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 어른들은 자기의 이웃과 특히 가장 가난한 자에 대한 신뢰와 사랑 속에서 자기의 믿음과 신앙심을 살 찌워 가야 할 것 같다.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신앙을 가진 자가 반드시 타인을 신뢰하고 있지 않다고 하니 얼마나 슬픈 일인가?
우리는 하느님과 자기와의 종적 믿음만을 생각하고 매일매일의 생활 속에서 자기와 관계되는 이웃에 대하여 사랑하고 신뢰하는 횡적 신앙을 망각하고 있지 않는지 냉정하게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십자가의 참된 뜻이 바로 하느님과 인간 및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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