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일곱 해 전의 일이다.
9ㆍ28 수복이 되어 피난지로부터 집으로 돌아오던 언덕길에서 나는 죽어있는 인민군의 시체를 보았다. 신원을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하얗게 구더기가 달라붙어 있었다.
그런데 바로 맞은편 언덕에는 마침 미국 병사의 장례식이 엄숙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군목이 집전하는 장례식에 따라 성조기에 덮인 시체가 땅 속에 묻히고 흙이 덮히었다.
그리고 십자가가 봉분 앞에 박히었다. 인천상륙작전에 희생된 유엔군 병사들의 가매장이라고 하였다. 나는 말뚝처럼 그 자리에 선 채로 그 장엄하고도 구슬픈 의식을 시종 지켜보았다. 그러나 무슨 까닭이었을까? 나는 그때 원인 모를 분노가 내 가슴 속에 끓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생각했다.
『하느님은 존재하는가? 세상을 이처럼 불공평하게 다스리는 하느님은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못된 공산군 한 사람이 죽어 구데기에 덮인 것쯤 당연지사라 생각하고 우리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억울한 이국의 원혼이 된 미국 병사를 위해서는 명복을 빌어야 옳았겠지만 그러나 기계적인 반응이 내 마음엔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또 생각했다.
『미국 사람은 복이 많아 죽어서도 저렇게 편안하게 묻히는데 우리 동포는 이게 무슨 꼴인가?
하느님이 만약 존재한다면 그는 무슨 맘을 먹고 우리 동포를 이 지경이 되게 만드는 것이가?
인민군에게 붙잡혀서 의용군으로 끌려간 나의 오빠는 지금 어디쯤에서 구데기밥이 되어 있을까?』
나는 또 생각했다. 공산주의가 무엇인 줄도 모르고 자식을 빼앗겼을 그 썩어가는 인민군의 부모님을. 싸립문 밖에서서 이제나 저제나 아들이 살아서 돌아오기를 기다릴 함경도 어느 촌락의 손마디 굵은 한 농부가 내 눈 앞에 어리었었다.
나의 어머니는 아글바글 구데기가 끓고 있는 그 인민군의 시체를 굽어보고 계시었다.
그 모습은 어쩌면 그 시체가 나의 오빠일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을 부인하지 못하시는 것처럼 보였다. 소문에 의하면 오빠와 오빠의 친구들은 숨어있던 곳에서 무더기로 잡히어 어느 중학교 교정으로 끌려갔는데 거기에서 하루 이틀 총대를 만져보고는 의용군이라는 날치기 군인이 되어 전선으로 수송되었다고 하였다.
나는 하나의 가정을 추리하고 있었다.
「전선으로 끌려가면 도중에 오빠는 죽음을 각오하고 편대에서 탈주했을까?
고향이 보이는 이 언덕길에 이르러 거의 다 왔다고 마음놓고 뛰다가、이쪽 편 아니면 저쪽 편의 총에 맞아 어머니 계신 집 쪽을 향해 몸을 돌리며 어머니! 하면서 이렇게 쓰러져 죽어버린 것일까.
어느새 나는 어머니 곁에서 울고 있었다. 나이 차이가 많지 않아서 오빠 소리가 입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나의 못된 고집 때문에 기어이 오빠 소리 한마디 들어보지 못하고 나와 이별한 가엾은 오라버니. 내 울음은 이미 미국 병사에 대한 부러움 때문이 아니었다.
구데기밥이 되어 있는 인민군 패잔병에 대한 동정심 때문도 아니었다. 오빠 대접을 못해드린 일이 미안스러워서도 아니었다. 미워하고 싸우고 총질하고 죽이는 이 끔찍한 동족상잔의 역사를 왜 하필 우리 겨레가 치러야 하느냐 하는 하느님을 향한 울분 때문이었다. 하느님을 그때만큼 원망한 적이 없었다.
그 후 여러 해가 흐르고 나도 철이 들어서 이 슬픈 동족상잔의 비극은 하느님 탓이 아니라 순전히 우리들 사람의 탓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만 스물일곱 번째의 6월을 보내고 이제 다시 9월이 다가오는데 가엾은 내 오빠의 소식은 여전히 오늘도 아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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