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이 이글거리는 한여름에 찾아가는 고향은 언제나 가슴이 시릴 만큼 서늘하다. 고향을 찾아가는데 굳이 계절을 따질 필요는 없겠으나 기왕이면 야청(野靑)빛깔의 원숙한 신록으로 뒤덮힌 여름에 고향과 만나면 마음이 넉넉하게 이글거려 좋다. 고향사람들의 끈끈한 땀 냄새조차도 상큼한 잎새들의 향기처럼 느껴진다. 나는 가난해도 마음은 멍석만큼이나 넉넉하고 정이 땀처럼 끈끈한 고향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여름의 귀향을 좋아한다.
나는 고향을 생각할 때마다 대밭을 줴흔드는 한여름의 그 청청한 대 바람소리가 뜨거운 태양으로 달구어진 내 심장의 한가운데로 밀려와 더위를 식혀주곤 한다. 대학의 연구실이나 아파트의 콧구멍만한 서재에 있으면서도 무등산 골짜기의 내 고향과, 흙과 같은 마음으로 욕심 없이 살아가는 고향사람들을 생각하면 어떤 더위도 이겨낼 수가 있다.
나는 한여름의 대 바람소리를 머릿속에 그리며 이 여름을 보내고 있다. 내 고향이 죽물(竹物)로 널리 알려진 담양이기 때문일까. 어느 시인은 『나를 키우건 8할이 바람이다』라고 노래했는데, 또한 그 청청한 대 바람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내가 태어난 곳은 죽물장이 서는 담양읍에서도 오십리 쯤 무등산 쪽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궁벽진 산골이다. 88도로 인터체인지에서 고서(古西)삼거리로 꺾어 담양군 남면면사무소를 지나 무등산의 오른쪽 새끼발가락쯤에나 해당되는 황토길 유듬재를 휘어 돌면, 산골의 후미진 끄트머리에 내가 태어나서 자란귀재(장단리)가 옛 모습 그대로 이끼처럼 가라앉은 채 나를 기다리고 있다.
울묵줄묵한 돌멩이들이 박힌 비포장도로를 덜컹거리며 휘어내려 가면 간짓대의 양쪽 끝이 앞산과 뒷산에 걸쳐질 만큼 좁장한 산골자락에 수백 년 동안 똑같은 모습, 똑같은 생각으로 죽은 듯 엎뎌있는 내 고향은 삼백년쯤 된 늙은 느티나무의 싱그러운 잎에 가리워져있다. 어쩌면 나의 십대조께서 광주에서 배재와 유듬재를 넘어 이곳으로 처음 오셨을 때 심어졌을지도 모르는 이 오래된 느티나무는 내가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그만한 높이와 넓이로 하늘을 가리고 서있다.
나는 어렸을 때 한여름 이 느티나무의 그늘 밑, 언제나 촉감이 서늘하고 판판한 당산돌을 지금의 내좁은 책상만큼이나 사랑하면서 콧물과 침을 게게 흘리고, 고누도 두고, 코피가 터지도록 싸움질을 하면서 자랐다. 어른들은 한여름들에 나갈 때는 언제나 이 느티나무 밑 당산 돌에 누워 더위와 고달픔을 잠시나마 풀었고 해마다 정월대보름 마당 밟기 굿을 칠 때는 먼저 이 당산나무에 둘러서서 당산 굿부터 하였다. 칠 십리 안에는 교회도 절도 없었기에 이 늙은 느티나무는 내 고향사람들에게 유일한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나도 어려서 이 느티나무에 나의 소원을 빌곤 하였는데 그 무렵 나의 소망이란 무등산너머에 있는 큰 도회지 광주에 가보는 것과 한번 집을 나가시면 여러 날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곤 한 아버지께서 빨리 돌아오시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부터 마을 뒤 대밭을 지나 꿀 참나무가 찝찝한 뒷동산에 올라 까치발을 하고 목을 길게 빼어 무등산을 꿈꾸듯 바라보곤 했었다. 이 세상에서 어느 산과도 견줄 바 없이 무등(無等)하게 여겨졌던 무등산은 그 무렵 봄에는 회색빛으로 출렁였고, 여름에는 야청빛, 가을에는 무지개빛, 겨울에는 은색으로 빛났으며, 지금은 사계절 가림 없이 횃불처럼 타올라 오늘을 밝혀주고 있다. 나는 무등산을 바라보며 꿈을 키웠다. 그때 나의 꿈은 무등산너머 광주에 가서 짐을 많이 실을 수 있는 큰 트럭의 운전사가 되는 것이었다. 나는 국민학교 5학년 때 터진 6ㆍ25전 까지 만해도 자동차를 구경하지 못 했었다. 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송유 짜기와 놋그릇 공출을 독촉하기위해 수시로 들락거리던 일본인 순사의 자전거가 고작이었다. 그 무렵 내가 꿈꾸었던 상상의 트럭은 언제나 나를 태우고 무등산 너머로 순식간에 비행기처럼 신나게 날아갔다.
내 고향마을 앞에는 야트막한 냇물이 흐르고 징검다리를 건너면 여름에는 손이 시리고 겨울엔 김이 포실하게 피어오르는 각시 샘이 있는데 한바탕 뛰어놀다 허출해질라치면 배가 쿨렁쿨렁해지도록 각시 샘물을 퍼마시곤 하였다. 지금도 그 각시샘물을 떠올리면 오장이 써늘해지면서 어렸을 때 꿈꾸었던 상상의 트럭을 타고 고향으로 달려가게 마련이다. 각시 샘위에는 물레방앗간이 있어 여름밤에는 빈 물레방아가 하염없이 삐그덕거리며 우리를 재워주었다. 이제 그 물레방앗간은 흔적조차 없어지고, 다만 빈 물레방아 소리만이 6ㆍ25의 슬픈 기억처럼 내 머릿속에 아픔으로 살아있을 뿐이다. 우리들이 여름이면 무자맥질을 했던 물레방앗간 옆 큰 둠벙도 무릎높이로 낮아져 어쩌면 내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이 이처럼 말라붙어 버리듯 하여 목구멍이 훗훗해지도록 슬퍼진다.
나는 이 마을에서 십리쯤 떨어진 국민학교에 다녔다. 한 번도 자동차가 다니지 않아 잡초가 휘휘우거진 신작로를 따라 학교에 가는 길은 언제나 즐거웠다. 학교 가는 신작로 주변에는 바디나물, 구절초, 오이풀, 용담, 이삭여뀌, 알꽈리, 삽주, 도둑놈의 갈구리, 콩 제비, 별꽃씀바귀, 광대수염, 뱀딸기, 큰방가지똥, 쇠뜨기, 속속이풀, 엉겅퀴, 질경이, 버들굼불초등 갖가지 풀꽃들이 봄부터 늦가을까지 어우러져있었다.
이제 나와 같이 국민학교에 다녔던 고향의 옛 친구들은 궁핍한 기억의 슬픈 사랑처럼 뿔뿔이 흩어져버리고, 고향을 지키는 몇 친구들은 쉰이 되기도 전에 할아버지처럼 가난하게 늙고 말았다. 나는 아픈 여름의 역사를 안고 있는 내 고향을 사랑한다. 나를 키운 것 8할이 바람이라면 나를 작가로 키운 것 9할이 아픈 여름의 역사를 안고 있는 내 고향이기 때문이다.
나는 고향에서 8ㆍ15와 6ㆍ25를 만났다. 내 고향은 그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처절하게 뒤틀림을 당하고 말았다. 6ㆍ25때 집은 불타버렸고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했으며 소개(疏開)라는 이름으로 삼년동안이나 고향을 비워두었었다 나는 여름이 이글거릴 때마다 고향의 아픈 역사와 그 여름에 죽음을 당했던 고향사람들을 생각 한다 그 여름의 아픈 기억을 생각하면 땀 대신에 슬픔과 분노와 공포가 되살아나 온몸의 개털까지도 빳빳하게 일어서는 것이다.
아-나는 이 지상에 아픈 기억속의 여름이 역사 속에서 잠들지 않는 한 나의 이 외롭고 가난한 영혼은 언제까지나 고향으로 가는 한줄기 바람이고 싶어라. 고향은 바로 나 자신이며 삶이고 나의 소설이며 사랑이고 인간 그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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