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5일이 되면 으레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이름도 성도 모르는 그를 나는 수간호원 언니라고 불렀었다. 스무여섯 해 전、6ㆍ25와 1ㆍ4 후퇴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버지와 오빠를 잃고 살아남은 나는 부평에 있는 어느 병원에서 무자격 보조 간호원으로 일하여야 했었다. 그 병원의 수간호원 언니는 입을 여는 일이 거의 없이 눈웃음과 입가의 미소로 환자들을 썩 잘 돌보았기 때문에 그분의 말이 생각나는 것은 겨우 두어 번밖에는 없다. 그러나 이 두어 번의 말을 나는 결코 잊지 못한다. 그 한 번은 8월 15일 날 아침이었다. 성당에 다녀오겠다고 그가 나에게 말을 했던 것이다. 나는 8ㆍ15 광복절 기념행사 때문에 수간호원이 성당이라는 곳에 가는가 보다고 생각했었다. 달포가 또 흘러갔다.
10월 초하루였다고 생각된다. 원장선생으로부터 수간호원이 병원을 그만두게 되었다는 말씀을 들었다. 내가 몹시 섭섭해 하는 것을 보고 수간호원은 병원 문 앞에까지 내 손을 잡고 나오면서 이렇게 말하였다.『내일 모레 나는 수녀원에 들어간다. 기도 속에서 우리는 항상 서로 만날 수 있다. 괴로울 때에는 예수님을 생각해라.
성녀 소화데레사는 옷 입을 때 잘못해서 어깨 살에 꽂힌 옷핀을 뽑지 않고 종일토록 아픔을 참으면서 십자가의 수난을 묵상했단다.』
그분이 떠나가 버린 후의 허전했던 한 달 남짓을 나는 몹시 괴로운 심정으로 보내었었다.
수녀원이란 어떤 곳이며 나는 장차 무엇이 되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또 무자격 보조 간호원 노릇이나 평생하면서 살다 죽어야 하는가를 골똘히 생각했었다.
나의 이렇듯 고민하는 모습이 그 병원의 청년 의사 선생을 감동시키었던 모양이다. 외국에 보내어 공부를 마칠 때까지 나를 기다리겠다는 조건을 첨부해서 젊은 의사 선생이 나에게 구혼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내 편에서 기뻐하고 고마워했어야 할 그 일이 내 가슴을 몹시 아프게 했었다. 결혼문제를 생각하기엔 내가 너무도 어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순간 내가 반드시 공부를 계속해야 한다는 것을 결심하였다.
그리고 오래간만에 다시 인천의 답동성당을 생각해 내었다. 전쟁이 일어났던 그 전해에 나의 어머님께서 꼭 한 번 찾아가시어 나의 동생을 살려 달라고 기도하였던 곳이었다.
그날 내가 버스도 다니지 않던 그때의 30리 길을 걸어 그 성당을 찾아갔을 때는 동짓달의 짧은 해가 꼴깍 지고 말았었는데 빼꼼히 열린 문을 밀치고 들어간 깜깜한 성당 안의 저 앞쪽에 등불 하나가 빨갛게 타고 있었다. 나는 생전 처음 기도라는 것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성난 소녀의 외침이었다.『하느님이 계시다면 제게 대답해 주십시요. 열네 살의 제가 왜 구혼을 받아야 합니까? 아버지가 안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돌려주십시요. 아니면 하느님이 아버지가 되어주셔야 하겠습니다』
나는 그때 하느님의 손이 내 어깨를 잡고 하느님의 목소리가 내 귀에 들린다고 생각하였다.『그래 내가 너의 아버지가 되어 주마.』성체조배 중이시던 본당 신부님은 그래서 내 영혼의 아버지가 되시었다. 그 신부님은 다음날 나를 당신이 이사장으로 계시던 한 여학교의 학생으로 만드시었다.
명동성당 뒤의 납작한 고옥에서 그 임종국 신부님은 지금 과거와 미래를 위해서만 살고 계신다.
8ㆍ15 광복절、아니 성모승천 대축일이 오면 나는 하느님께서 나를 위하여 섭리하셨던 온갖 일들을 생각하고 한없이 목이 메인다. 오늘은 임종국 신부님을 찾아가 뵙겠다.
신부님은 옛날처럼『마리아냐? 사고 싶은 책 있거든 사려므나』하시며 지폐 한 장을 쥐어주실까?
돌아오는 길에는 명동 성당 앞에 잠시 서성이며 오가는 수녀들의 눈과 입매에서 그 옛날 수간호원의 천사 같던 미소도 찾아보아야지….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