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은 위령성월이고 2일은 위령의 날이다. 이때가 되면 이미 죽은 이를 생각하고 장차 올 죽음을 깊이 생각하게 된다. 이는 세계 교회가 공동으로 하는 일이지만 특히 한국에서는 음력 십월에 해당되는 시기로서 예로부터 조상 숭배의 정신으로 시제 또는 묘사로서 선조들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이 예법으로 되어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 교회의 전통과 한국의 관습이 서로 합치된 것은 실로 우연한 일이 아닌 것 같다. 가을 바람이 소슬하고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사람의 마음이 허무를 느끼고 죽음을 연상하게 됨은 동서고금이 매일반인 것이다. 그런데 위령의 달에서 요구하는 것은 죽은 이를 추모하고 위로하고 감사하고 또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이다.

즉 이미 죽은 부모나 조상ㆍ친척ㆍ친지ㆍ은인들에게 생전에 이루어준 공로에 감사하고 그들의 영혼이 하루 속히 하느님의 완전한 행복에 참여할 수 있도록 위로하고 기도하는 것이 위령성월의 근본 취지인 것이다. 그러므로 원래 조상에 대한 제사 관념이 두터운 우리로서는 형식화된 제사보다도 오히려 영적이고 내적인 위령의 기도를 성의껏 바치는 것이 우리 고유의 의식으로나 교회의 영성으로나 다 함께 선익을 가져오는 일이다.

이 위령의 달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의의가 부여되고 있다. 그것은 이미 죽은 이를 추모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장차 올 우리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는 시기로 제공해 놓은 것이다. 즉 이 한 달은 특별히 죽음의 문제를 깊이 사색하고 묵상하는 기간으로 지내보자는 것이다. 죽음에 대해서는 성서의 여러 곳에서 수많은 표현과 해설이 있고 또 교회의 가르침에도 분명한 교리로 제시하고 있다. 그렇지만 죽음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명쾌한 대답을 하기는 너무나 어려운 과제이다. 여기서는 다만 몇 가지의 문제 제시만으로 우리 모두의 묵상 자료로 삼아보려고 한다.

①죽음과 삶과의 관계에 대해서-이 관계를 사생관이라고도 한다. 죽음이 무엇이며 삶이 무엇인가. 또 삶과 죽음과의 관계가 어떤 것인가의 문제는 주로 철학의 문제로서 처리되는 것 같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종교적 차원에서 어려운 문제를 완전히 해결 지어놓은 것이다. 즉 죽음은 생의 소멸이나 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삶에로의 옮아감, 즉 생의 변화이고 연장으로 보는 철저한 사생관을 갖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인생관 중에서 또 모든 종교 중에서 가장 완전한 진리이고 특징인 것이다.

②다른 하나는 사람은 죽기 위해서 사는가 또는 살기 위해서 사는 것인가의 이상한 문제를 제시해본다. 역설적이지만 사람은 죽기 위해서 산다고 먼저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이 세상에서의 인생의 종점은 틀림없이 죽음이다. 죽음이 곧 목적지인 것이다. 죽음이란 목적지를 향하여 나그네길을 걸어가는 것이 인생의 삶의 길이다. 그러나 목적지인 죽음은 최종점(period)이 아니고 오직 중간점(Comma)인 것이다.

중간점을 운환점으로 해서 영원한 생사로 전개되는 것이 우리의 사생관인 바에는 이 세상에서 영세상에로의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죽임이란 전환점이다. 좋은 죽음의 전환점은 영생으로, 나쁜 죽음의 전환점은 영멸로 들어가는 갈림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일생의 삶은 좋은 죽음을 쌓아올리기 위한 준비와 축적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서 항상 깨어 있으리라는 말씀은 바로 이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될 것이다.

③끝으로 죽음을 생각하는 데만 그치지 말고 죽음을 실지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죽음을 잘 죽어서 영원한 좋은 삶을 얻기 위해서는 살아있는 동안에 잘 죽는 연습과 실적을 쌓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곧 내 안에 죽어야 할 요소가 너무나 많다는 것을 자각하고 그것에서 죽어야 한다. 근본적인 것은 우리 안에 남아있는 원죄적 요소인 이기심이다.

자기위주의 이기심은 하느님으로 향하고 타인으로 향하는 마음을 막고 모든 것을 자기 안으로만 끌어들이는 죄의 주인공인 것이다. 이것을 철저히 죽여 없이 하는 것은 곧 그것에서 자기 자신이 죽는 것이고 바오로 사도의 말씀한 바 묵은 사람이 죽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할 때 삶 안에서 죽음을 미리 맛보고 또한 잘 준비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이 몇 가지 문제점으로 위령의 달을 묵상하는 참고 재료로 드리고자 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