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울릉도의 여름바다를 보여주고 싶어 한 것은 오래전부터였지만 올해도 나는 남편과 아들, 손자 3조손을 떠나보내고 집에 혼자 남기로 했다.
그들의 여정은 3박 4일 이었므로 나에게는 약 1백 시간이 고스란히 나만의 것으로 주어진 것이다. 이럴 때는 언제나 한꺼번에 많은 선물을 받은 것 같은 뿌듯함을 느낀다. 1백 시간…많은 시간이다.
전화도 수화기를 놓아버리고 밀렸던 일을 해버리고 정원손질도 하고 무엇보다도 느릿한 마음으로 책을 읽고-
파출부 아줌마에게도 휴가를 준다. 청소를 하고 혼자서 신경 쓰지 않는 식사를 하고 잠깐 누워 쉰다. 흐뭇한 해방감이 더위를 잊게 한다.
마음 내킬 때 일어나 버릇대로 성경을 아무데나 펴고 읽는다. 펴진 곳은「필립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4장이다. 역시 버릇대로 아무 행에서부터 읽는다. 11절이다. 대단히 불근신한 봉독 법일지 모르나 나는 언제나 이렇게 성경을 읽는다. 그러면 성경말씀이 눈부신 빛살같이, 청렬한 물줄기같이 내 마음에 꽂히고 나를 씻어주는 것이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자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비천하게 살줄도 알며 풍족하게 살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용할 수 있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을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
성경 속 말씀은 그 어느 구절하나 헛된 것은 없지만 이 말씀은 나에게 바른 마음과 몸가짐을 일깨워 주신다.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고 만족한다는 것은 어쩌면 낙후 적이고 소극적이며 잘못된 가치관이나 제도조차도 고정시켜버리는 것이 라고 할지 모르나 이 말씀은 인간의 의지와 능력의 강인성과 우연성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언제나 어느 경우에서나 주어진 조건하에서 굽히지 않고 오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자세라고 바꾸어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말로는 쉬운 일이나 기실「그분의 힘을 입지」않고는 실천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나는 성경을 덮고 생각에 잠긴다. 이 또한 마음을 흔드는 성구를 읽었을 때의 버릇이다. 돗자리만 깐 방바닥의 차가움이 쾌적하다.
매미소리가 들린다. 나는 그 소리가 어디서부터 들려오는가를 안다. 맞은편 댁 뜰의 은행나무에서 부터다. 그 나무를 나는 새싹 때부터 알고 있다. 30여 년 전의 늦은 봄이었다. 그 집에 살던 부인이 어느 날 흥분된 얼굴로 뛰어왔다. 담 밑에 은행 싹이 돋아났다는 것이다. 어쩌다 거기 떨어졌던 은행 알이 발아를 한 것이었다. 햇빛도 잘 안드는 침침한 좁은 담 밑에서 이 나무는 추위에도 지지 않고 가난한 햇빛도 개의치 않고 잘도 자랐다. 그것은 나무가 마치 강한 의지로 서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었다.
10년이 가까워 질 무렵부터는 열매도 많이 달게 되어 해마다 가을이면 햇 은행선물을 받기도 했다. 지금은 정정한 대목이 되어 매미도 와서 울고 새들도 와서 지저귄다. 지붕보다도 훨씬 높이 솟아 먼데서도 의젓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벌거벗은 채 긴 겨울을 견뎌내고 봄이 오면 연녹색 새싹을 꽃같이 돋게 한다. 병든 잎 하나 없이 싱그러운 부채 모양의 푸른 잎을 가을이면 비치듯 투명한 노란색으로 물들이며 아마도 무성한 잎 그늘에 고즈녁히 남모르게 피웠을 꽃들을 알알이 결식시키 후 노오란 소나기 같이 잎을 떨어뜨리고 다시 나목으로 돌아가 침묵에 잠긴다.
넉넉지 못한 뜰을 가진 고만고만한 중류가옥이 이마를 맞댄 도시의 메마른 여항(閭巷)에서 그 나무는 담에 바싹 닿은 비좁은 어둑한 모퉁이에 의지로 굵어진 줄기를 박고 환경과 절기에 순응하면서 계절의 바뀜을 알려주는 것이다. 성찬같이 쏟아지는 여름의 태양에도 겨울의 음산한 엷은 태양에도 오하지도 굴하지도 않는 그 모습에 나는 바오로의 이 말씀을 실천하고 있는 표양을 목도하는 느낌을 가질 때가 많다. 나는 나무만도 못한 소견을 가진 것이나 아닌지 하고 스스로를 되돌아 볼 때도 있다.
매미는 또 한마리가 날아 왔는지 듀엣으로 운다 아무도 없는 집 차가운 방바닥에 구르면서 듣는, 지금은 누가 사는지조차 모르는 그 집의 컴컴한 담 밑에 서있는 은행나무로부터 들려오는 매미소리는 한일(閑日)의 느낌을 짙게 준다.
나는 어쩌면 울릉도 여름 바닷가에서 보다 더 시원한 피서를 하고 있는 것 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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