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 교수가 강의실에 낡은 노트를 가지고 와서 노트를 읽어준다면 젊은 학생들은 무조건 그런 강의를 싫어할 것이다. 학생들은 그런 강의를 하는 교수에 대해서 구태의연하다느니 보수적이니 하는 말을 쓴다.
이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보수적이라는 말은 그 말 자체가 시대에 맞지 않으며 좋지 못한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것처럼 여긴다. 그리고「참신하다」「새롭다」「신기하다」는 말은 그 말 자체가 이미 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것처럼 여긴다.
다른 곳에서 배울 수 없는 것을 유럽의 오래된 수도원에서 배울 수 있다. 아니 유럽에서 배울 것이 있다면 수도원 밖에 없다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유럽 문화라면 바로 수도원이 연상될 정도로 수도원은 유럽 정신문화의 심장이며 중추이며 인류 문화의 마지막 보루다.
수도원이 어떻다는 이야기는 간단히 설명할 수도 없으려니와 나와 같은 사람이 함부로 설명할 것이 못 되는 것 같다. 나는 유럽에 6년 동안 있으면서 내 소원대로 수도원에 자주 가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저 유명한「빈」숲 속에 자리잡고 있는「하일리겐크로이쯔」수도원에서 나는「만남」의 기쁨을 만끽할 수도 있었다. 여기서 나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좋은 분들을 여러 분 만날 수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내가 존경하고 사모해 마지않은 분이 계신데 그분은 23세에 신학 박사 학위를 받으시고 26세에 교수 자격 논문에 통과한 주제요「인스브르크」대학교와「빈」대학교에서 교회학 교수를 하신 리들 신부님이다. 그는 최근에도 한수자처럼 생활하시기에 그 수도원에 자주 다니는 사람들도 좀처럼 그를 만나지 못한다. 학위 논문을 쓰는 동안에 나는 여기서 지냈는데 우연히 내 옆방에 어떤 수도자가 묵게 되었다.
그는 자청해서 수도원 도서관의 장서를 정리하셨다. 매일 자주 만나뵙게 되는데도 은은한 미소만 띄울 뿐 보름이 지나도록 그 흔한 인사말 한마디 없으셨다. 그는 트라피스트회의 수사인데 나그네로 이 수도원에 기숙하신다고 다른 수사들에게서 들었다. 그러던 어떤 날 어떤 수련 지원자가 발목을 크게 다치게 되자 그 수사님은 말문을 여셨다. 그런 후 그는 또 침묵을 지키셨다. 성무일례를 노래로 바칠 때에도 그는 입을 다물으셨다. 그러나 어떤 날 내 방에 들어오셔서 너무 무리하면 안 된다고 하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수도원에 있는 그림과 조각에 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철학과 신학에 관하여 말을 나누었다. 그 후 우리는 자주 어울렸다.
그분은 한때 이름난 의사였는데 2차 세계대전에 군의관으로 종군하셨고, 쏘련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석방되신 후에 가사를 정리하고 바로 트라피스트회원이 되신 분이었다. 그가 이 수도원을 떠나기 얼마 전 어느날, 나에게 좋은 친구가 될 사람을 소개해 주겠으니 그분한테 가지고 하시기에 따라갔더니 그분이 바로 리들 교수였다. 그는 홍안백발이었다. 그런 후 트라피스트 수사(요하네스 박사)님은 어디론가 가버리셨다. 언젠가 나는 리들 교수님에게 저술을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한 평생 하루 6시간 이상을 독서하는 분이고, 신학 서적의 서평가로 널리 알려지셨고, 중요한 학술대회에 초대 받아가서 강평도 하시고 많은 제자를 두시어 그분의 지도하에 수십 명의 신학 박사가 나왔으되 뚜렷한 저서가 없는 것이 이상해서 나는 우문을 던졌었다.
그는 나의 물음에 아무런 응답도 하시지 않으셨다. 얼마 후 그는 수도원 도서관에 나를 데리고 가서 수결본 진본 등을 두루 설명해 주시고 나서 신학 서적이 너무 많아서 한 세월을 다 보내셨다고 하시면서 내가 새롭게 더 쓸 것도 없으려니와 쓴다면 이미 남이 말한 내용을 되풀이하게 될 것이고, 더욱이 젊은 사람들이 나를 구태의연이니 보수적이니 할 것이라고 하면서 파안대소하셨다. 공자의 述而不作信而好古라는 말을 그때 깨달았다. 말씀에 옛 것과 새 것이 따로 있지 아니하듯이 보수와 진보가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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