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성탄절을 앞두고 이 겨울에 전국 교구에 걸쳐 여러 명의 새 사제가 탄생하였다. 영원히 계속되는 구세사 안에서 사제의 근원이요 모범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영혼의 전장에 나서는 이 일꾼들에게 먼저 축하와 존경을 보낸다.
그리스도가 그러하셨듯이 사제의 본분은 어떤 한정된 작은 일에 종사하는 것이 아니고, 땅 끝까지의 세계적 넓이에 참여하는 스승이요 통솔자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듯이 스승이요 통솔자인 사제의 길은 섬김을 받으려 하기보다 섬기며, 군림하기보다 봉사하며, 영화롭기보다 고독하며, 끝내는 안주하기보다 십자가를 지고 비틀거리며 언덕길을 오르는 운명이게 되어 있다.
사람들의 스승이되 이 스승이 되기 위해 종 노릇을 해야 한다는 역설적 원리 때문에 사제직은 세속의 직분과 전혀 다르다. 여기에서 사제들에게 갈등이 생기기도 하며 이 갈등이 바로 십자가가 되기도 한다.
오늘의 한국 교회 안에서 그 어려운 성직의 십자가를 지고 새 출발을 하는 젊은 사제들에게 거는 우리의 기대는 크다. 신자들 중에서는 사제에게 너무 큰 기대를 걸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사제도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한계와 약점을 극복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심은 기본적으로 타당한 것 같지만 이해심은 사제에게서 발견된 어떤 실망을 망각해 버리려 드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결국 사제는 분명히 속인들과는 다르게 용감히 고독을 참아 이기고 부지런히 봉사하는 길을 통해서 스승이 되지 않으면 안 될 사람이다.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당초에 사제로 출발한 것부터가 잘못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새로 출발하는 사제들에게 참고가 될까 하여 한국 교회의 신자 대중이 사제들에게 바라는 몇 가지 기대를 비속한 통념 그대로 제언해 보려 한다.
①사제의 독신 생활은 분명히 인간으로서 고독을 예리하게 일깨워줄 것이다. 그러나 이 고독은 원래 인간들에게 온전히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일념으로 주님에게 일치되려는 데에 목적이 있으므로 고독에게 붙잡혀 앉아 있을 만큼 한가해서도 안 될 것이다. 하물며 고독을 보상받기 위하여 어떤 귀족적 호사 취미에 빠져드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시골 교구의 가난한 본당 사제로서는 귀족 취미를 부릴 여유도 겨를도 없는 점에서 오히려 은혜이지만 도회지 사제들에게 허영과 나태가 스며들 수 있다.
②한국 교회의 사제로서 서양사람 같은 인상을 풍기는 일이 없게 되기를 바라고 싶다. 사제의 방에 들어가면 으레 양주와 양담배가 있고 서가의 책들도 양서로 채워져 있다면 이것도 한국의 민중으로부터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 복음 전달의 효율과 그리스도교의 토착화를 위해서도 한국 사제는 한국의 문화와 현실에 정통한 사고방식을 지녀야 한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한국의 국사학ㆍ국문학ㆍ민속학 계통의 책들을 가까이 하며 계속하여 공부를 하는 자세도 필요할 것이다. (신학교에서부터 이러한 교육이 강화될 필요가 있다.)
요즈음 사제들의 평복 차림이 늘어나는 현상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면이 없지는 않지만, 대체로 자연스럽고 편리하여 좋 은면이 훨씬 클 수 있다. 즉 대중에게 친근감을 주고 대중 속에 침투하여 사목활동을 전개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제는 모름지기 민중의 밑바닥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괴로움과 즐거움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③참신하고 착한 젊은 사제여 평신도를 고무하고 활용하라. 교회가 세상의 소금이 되려고 할 때, 교회가 사회 속에 현존하고 사회 속에서 활동하려 할 때 평신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안 된다. 그보다도 원천적으로 평신도가 없으면 교회도 없으며, 사제가 섬기고 봉사하려는 대상이 일차적으로는 평신도이다.
사회 안의 다양한 전문적 지식이나 재능을 사제 혼자서는 갖추고 있지 못한 것이 당연하며 따라서 교회가 활성화 되려면 평신도의 그 지식과 재능과 또는 물질을 동원하여 활용해야 할 것이다.
존경하는 젊은 사제여, 그대는 본당의 구석구석으로 머슴처럼 비실거리며 숨어다니고 허술한 잠바 차림으로 오막살이 신자의 집에 들러 무릎을 맞대고 앉는 가족이 되라. 그러다가 제단에 나서면 거룩한 제주가 되고 그대의 잘 준비된 강론으로 존경 받는 스승이 되라. 그리하여 이 나라와 세계를 진리와 정의와 사랑이 넘치는 천국이 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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