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더 있으면 이 해의 복자성월도 지나가버린다. 해마다 우리는 복자성월을 맞이하여「복자찬가」를 부르며 우리의 선열 순교자들을 추앙한다. 이조 말기 약 1세기에 걸쳐 1만여 명의 천주교도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기를 고집했기 때문에 모진 고문을 당하고 마침내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다는 것은 놀랍고도 장엄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순교자들의 장거를 추앙하는 정신적 자세도 한 번 반성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즉 우리는 옛 순교자들을 존경하는 것이 하나의 회고취미일 뿐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인식하는 태도는 복고라든가 회고를 떠나서 과거를 현재에、현재를 다시 미래에 진전시켜 우리가 오늘과 내일에 있어 해야 할 일이 무엇이고 걸아가야 할 방향이 어느 쪽인지를 역사로부터 배워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역사의식」에 비추어 판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조 때의 그 만여 명 순교자는 각자가 신앙으로서 위해하였다. 그리고 이 순교 뒤에 마침내 신앙의 자유도 이 땅에 찾아왔다. 그런데 조선에서 신앙의 자유가 성위된 것은 천주교도의 순교 행렬 때문만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조선 왕국이 쇄국주의의 한계를 느끼고 서양 나라들에 문호를 개방하게 되는 국제적 정치 역학의 결과가 작용한 것이기도 하다. 즉 1880년에 김홍집이 외교관으로 일본에 갔다가 일본 주재 청국 공사관 관리였던 황준창으로부터「조선책략」이란 책을 받아가지고 왔고 이 책 속에는「조선이 미국ㆍ청국ㆍ일본과 손을 잡고 러시아의 남하 세력을 막아야 한다」는 귀절이 들어 있었다.
이 책을 들려본 중신들과 유교 선비들은 천주교가 신앙의 자유를 얻을까 경계하여 임금에게 천주교 탄압을 주장하는 강력한 건의문을 올렸다.
그러나 고종 임금은 이미 시대 정세를 막을 수 없음을 깨닫고 천주교 탄압을 극렬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을 귀양보내고 또 사형에 처하기도 하였다.
이어서 1882년부터 미국을 비롯하여 서양 나라들과 국교를 맺으니 조선에서의 신앙의 자유는 갑자기 촉구되지는 않았지만 원칙상 활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막상 신앙의 자유를 얻은 후에는 천주교가 한국 사회에서 무엇을 하였는가? 이 단계를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동안 천주교는 모진 박해 속에서 쫓기고 숨어 다니며 교세를 유지해오느라고 지쳐버린 때문도 있는지 모르지만 그보다는 이제 공공연히 교회 조직과 교계제도를 활성화하기에 이른 교회 당국이 천주교를 폐쇄적이고 은둔적인 길로 이끌었으므로 천주교가 한국 사회의 개화 및 근대화에 있어 주도적 이치를 차지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뒤늦게 이 땅에 들어온 개신교 세력의 사회진출을 예로 들어 대비해 봄으로써 뚜렷이 알 수 있다.
개신교 선교사로서는 미국인 알렌이 1884년에、역시 미국인 언더우드와 아펜셀라 부부가 1885년에 이 땅에 첫 발을 내어 디뎠다. 이때는 이미 신앙 자유의 터전이 마련된 때였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장로교 감리교 등 교파별로 한두 명씩 개인이 이 땅에 들어왔지만 곧 광혜원이란 병원을 세우고 일본인들의 문비 살해사건 때에는 高宗 임금을 호위하려 했던 이른바「춘생문 사건」을 일으켜 일본의 불의로운 조선 침략에 저항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그 뒤 개신교 세력은 독립협회와「독립신문」을 도왔고、배재ㆍ이화ㆍ연세를 비롯 수많은 교육기관을 세워 한국 사회의 개화 및 근대화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919년의 3ㆍ1 독립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 중에는 개신교 인사만 16명이었고、6월 30일까지의 투옥자 수를 보면 유ㆍ불ㆍ천도교인이 1천5백56명인데 비해 개신교 신자는 2천백90명이 투옥되었다.
그 뒤 1935년대부터 시작된日帝의 신사참배 강요 시절에도 개신교 측에서는 평양 신학교를 비롯 수많은 학교와 교회가 문을 닫았고、2천여 신도가 투옥되었으며、50여명의 교역자들이 순교하였다.
이렇게 되어오는 동안에 개신교는 한국 사회 모든 분야에서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러면 천주교 측은 어떻게 된 것인가. 일찍이 만여 명의 순교자가 뿌린 피가 그 순교자들 자신과 그 당대의 사실로서 지극히 위대하였건만、그들의 뒤를 이은 신자들과 교회는 이 나라와 이 민족의 정의로운 생존권을 옹호하는 일에서 도피하였고、전대의 순교자들과는 반대로 안일 무사주의로 타락하였다. 그 일제 말의 신사참배 시절에는「국가가 있은 후에 종교가 있다」는 비그리스도교적 궤변을 받아들였었다.
이제 오늘의 우리는 한국 사회의 복판에 들어서서 그리스도교 진리를 앞세우는 생활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만여 명 선열 순교자들의 피를 헛되이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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