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노자가 한 말에『자신을 비우라』고 한 것이 있다. 그릇을 비워야 거기에 무엇을 담을 수 있다는 말이다. 비슷한 의미로서 아들프스 신부가 쓴「神의 무덤」이란 책에「케노시스」(Kenosis)란 말이 나온다.「자기 공허화」를 뜻하는 이 말이 미래의 교회가 선택해야 할 길이라고 되어 있다.
『교회에 미래가 있어야 한다면、교회는 전시효과에 대한 애착을 버려야 한다. 그리스도를 위해서、교회는 복음성서에 따른 가장 깊은 뜻에서「청빈」해져야 한다. 교회는 종이 되어야 한다. …주인이 아니라 종노릇을 해야 하고 잘못을 용서하고 자기의 원수를 사랑하고 저주해서는 안 된다는 계율은 개인만이 지켜야 하는 것인가?』아니다.
교회 자체가 이런 그리스도교적 실천에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교회는 어떻게 되겠는가. 아마도 자기 공허화를 성취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비워진 큰 그릇에 이 세상을 담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흔히 길거리에서『주 예수를 믿으라!』하고 큰 소리로 외치며 서 있는 사람들、가정방문을 하며 교회에 나오라고 졸라대는 사람들이 전교의 역군으로 여겨진다.
그런 이들 나름의 역할도 불필요하다고 잘라 말할 수는 없겠지만「예수를 믿는다」는 자체에 도취되기보다는 예수와 하느님 의리를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그 진리를 실천에 옮겨 나아가는 것이 근본적으로 전교의 수단이 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와 신자들이 같이、교회의 간판이나 또는 신자 개인의 세례명이 세상이라는 밀가루 반죽 속에 숨어 들어가 누룩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전교도 복음화도 관념의 놀음이 된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은 뾰죽당의 십자 철탑이 늘어나는데 정비례하여 타락해갈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타락화의 현실을 우리는 현재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말로써 형식으로써 신앙에 도취되어 경건한 거동을 보이는 것만으로써 훌륭한 신자라고 생각할 수 없다.
교적부에 이름이 올라 있는 교무금을 빠짐없이 내고 1년에 두 번 아니면 한 번 아니 그 이상 여러 번 고백성사를 보는 것만으로 하느님의 자녀로서 본분을 다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그렇게만 하면 된다고 비신자들에게 설득하는 것이 진정한 전교가 되지도 못할 것이다.
교회의 의식만을 잘 지키는 것은 저 옛날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가는 길가에 있었던 사제와 신자 레위 사람도 잘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곳에서 강도를 만나 길에 쓰러진 사람에게 다가가 구해주지 못하고 지나가 버렸다. 오히려 비신자인 사마리아 사람이 자나가다가 그 딱한 사람을 일으켜 여관에 데려가 구해 주었다. 어느 쪽이 더 그리스도인다운 사람인가. 그리스도는 그 사마리아 사람을 하느님께서 더 반기신다고 말씀하였다.
따라서 신자들이 비신자들을 거칠고 죄 많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든가, 자신들은 이미 구제 받은 영혼의 소유자라고 자만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태도이며 위선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자들만이 구원을 얻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신자인 것은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교 신자인 것은 역사를 위해서 그리스도적 봉사가 의의를 지녔고 또 필요하기 때문이다』이것은 요셉 라싱거 추기경이 한 말씀이다.
너무 신자의 신분을 내세우지 말아야 한다. 예수장이 냄새를 너무 풍기면 세상으로부터 거부 반응이 온다. 확실히 그런 편협한 선민의의이나 당파성은 오히려 비그리스도적 사고방식이다. 우리는 교회와 세속을 너무 갈라서 생각하지 말자.
우리는 천주교회가 너무 냉정히 그어놓고 생각하지 말아야 하며 천주교 성직자가 구속되었을 때에만 충격을 받아 기도회를 열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태도는 하느님 백성 전부에 대한 사랑이라기보다 천주교라는 종파의 권위가 손상되는 데에 반발하는 오만심이라고 볼 수 있다.
성직자나 신자보다도 교회 밖의 비신자들을 위해서 우리 모두는 무언가 행동으로 도와주어야 한다. 도우되 우울한 손실감 시혜의의으로써가 아니고 즐거운 마음으로써 해야 한다.「사랑」이란 말도 너무 시들고 더렵혀졌다.「거짓없이 좋아하는 마음」으로 나를 낮추고 감추면서 하느님의 손이 되어 우리가 이 세속을 보살펴야 한다.
교회의 울타리를 허물고 우리가 세속으로 들어가고, 세속 사람들을 교회에 초대하자. 어려운 일을 같이 의논하고 서로 순수한 우정을 가지고 돕자. 이것이 하느님의 백성의 일치요 평화이며 이것이야말로 참된 전교요 복음화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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