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교외 스프링필드를 방문했다. 마중나온 엘리사벳 할머니는 밤 10시쯤 되었는데도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우리를 성당으로 안내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먼 곳까지 찾아왔으니 먼저 성체께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방은 어둡고 숲속의 도시는 조용하기만 한데 성당안의 한 조그만 방에는 성체가 현시되어 있었고 몇 몇 미국인 신자들이 무릎을 굻고 침묵 속에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문명이 고도로 발달하고 물질만이 풍요로운 줄 알았던 미국땅에서 깊은 신앙의 한 모습을 체험한 순간이었다. ▶성체가 모셔진 제단에는 촛불은 켜져 있어도 별로 화려하다고는 느끼지 않았다. 깨끗하고 단조롭고 품위가 있을 뿐이었다. 일 년 동안 매일같이 24시간 내내 성체를 현시하고서 본당신자 한 가정씩 시간을 정해 잠시도 성체를 홀로 외로이 계시지는 않게 한단다.「성체와 가정의 해」를 올바로 지내는 방법을 여기서 배웠다. 방안에는 성체조배를 위한 안내문이나 기도순서가 적힌 것은 없었고 성가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언제나 침묵만이 있을 뿐이었다. ▶침묵은 시간을 정지시켜 버린다. 그래서 영원의 세계를 맛보게 한다. 그런데 우리는 찰나를 좋아할 뿐 긴 시간을 즐기지 않는다. 미사시간도 짧아야 좋고 강론도 짧을수록 좋고 기도도 짧아야 좋다. 어쩔 수 없이 긴 시간은 기분이라도 짧게 만들어야한다. 그래서 미사 중 내내 성가를 불러야하고 강론 때는 아예 주보라도 읽어야한다. 일 년 중 한번 철야성체조배를 하는 성목요일에도 밤새껏 큰소리로 기도하고 성경 읽고 노래를 불러야한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라고 하는데…대화는 서로가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다. 만일 우리만 일방적으로 이야기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면 그것은 대화도 아니요 기도는 더더구나 아닌 것이다. 하느님께 기도했는데 들어주지 않더라는 불평을 한다. 하느님이 타일러 주시는 말씀도 못 듣고. 위로의 말씀도 못 듣고 나와 버렸으니 기도는 헛것이었다. 성체와 가정의해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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