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恨)은 한국고유의 것이 아닌가 싶다. 그것을 대신할 외국어 낱말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실은 우리의 말로도 한의 정확한 정의를 내리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내가 한을 설명하려할 때 인간 언어의 불완전성을 느끼게 된다.
한은 선험적 실존적으로 느껴지고 체험적으로 파악되는 실재일 뿐이다. 하여간 한국의 문화는 한의 문화이다. 한은 한국적인 모든 것에 스며있다. 그것은 한국인의 피 속에 하나의 유전자로서 흐르고 있다. 그것은 한국의 언어ㆍ풍습ㆍ문화ㆍ예술 등 모든 분야에 깔려있다. 그것은 또한 상봉의 기쁜 눈물 속에도 있는 별리, 특히 사별의 오열이나 통곡 속에서도 찾을 수 있다.
한은 확실히 반면 년 역사를 따라 물려주고 받은 한민족의 유산이다. 그것은 소위 지정학적 상황의 산물인지도 모른다. 단 한 번도 스스로 나라를 탐내 본 일이 없으면서도 주변 국가들의 탐욕의 대상이 되어온 한반도, 남을 거느려 보지 못하고 오직 남을 섬겨 본 일만 있는 한반도의 기구한 운명의 소산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열강들이 끊임없이 가해온 정치 경제 외교 면에서의 물리적 심리적 정신적 압박의 역사가 한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우리의 내적 요인, 즉 우리민족 자신이 만들어낸 요인도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유구한 역사를 통해서 해결되어 본 일이 없는 정치적 양극 현상ㆍ경제적 불균형ㆍ반상계급과 남녀차별 등이 빚은 사회적 모순과 부조리 등이 한의 문화를 창조하는데 크게 이바지해 온 것이다.
한은 얼핏 저주스러운 유산같이 보인다. 그러나 기실 그것은 하나의 축복이다. 하느님을 찾게 하는 촉매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3세기의 서방교부 떼르뚤리아노는 인간은 그리스도인다운 품성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을 했는데, 나는 한 국민이 천성적으로 그리스도인다운 마음을 지닌다고 강변할 자신은 없지만 그러나 천부의 깊은 종교적 심성을 지니고 있음을 믿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그것은 내가 한의 축복을 알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그것을 시켜 우리의 잠을 늘 흔들어 깨우시며 정신을 차리게 하신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상대적인 것, 지나가 버리거나 없어지고 말 현세의 사물의 무상과 허구를 깨닫게 하신다. 그리하여 현세 것에 만족하거나 집착하지 못하게 하시는 한편 늘 절대적이고 영원한 것을 찾게 만드신다.
한국에서 남달리 복음 선포가 잘 되고 있음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인데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국문화가 한과 결별하지 않는 한 이 현상은 지석되리라는 것이 나의 확신이며 소망이다. 가톨릭뿐 아니라 어떠한 종교도 한국에서는 잘된다. 개신교 종파들도 번성하고 불교 역시 잘 자란다. 원시 종교나 사이비종교 심지어는 미신과 같은 모조신앙도 극성이다.
한국의 경제수준이 매우 낮았던 30년 전의 일이 생각난다. 그때 나는 상당수의 내ㆍ외국 종교관계 인사들이 다음과 같이 예언하는 소리를 들었다-지금한국이 혹독한 전쟁을 치룬 터이고 또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에 자연히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 위안과 안식을 종교에서 찾으려 들지만 두고 보라 경제수준이 오늘의 일본 정도가 되는 날에는(당시 일본의 1인당 연평균 소득은 9백 달러)그러나 사람들처럼 정신적이며 초 자연적인 가치를 중요시하지 않고 물질주의에 빠지게 될 것이다-라고.
그러나 그들의 예언은 적중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경제가 그 당시의 일본수준을 상회하고 있는 오늘 한 민족의 종교심은 그 만큼 약화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상승세를 보이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방한 시 지적하였듯이 한국의 가톨릭교회는 교육이나 생활수준 면에서 서민층에 비해 중류이상의 엘리트 계층에 있어서 강세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 그 특징이다. 나는 이런 현상을 가지고 자랑하자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다만 우리 교회의 선교노력이 서민층을 향해 기울어져 왔지만 서민층과 함께 부유층과 지식층에서도 똑같은 호응을 받고 있는 사실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부의 많고 적음 지식수준의 높고 낮음은 상관없다. 한반도에 한민족으로 태어난 이상 물려받은 한을 품고 살아야 할 운명에 있어서는 차별이 없는 것이다.
나는 한때 우리의 문화에서 그리고 우리의 마음마다에서 한이 사라져 버리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그러나 한을 우리민족에 내려진 하느님의 귀중한 선물임을 깨달은 오늘에 와서 그에 대한 내 태도도 바뀌었다. 한반도에 한이 극심하였을 때 하느님은 우리나라에 복음의 씨를 뿌려주셨고 순교의 영광으로 우리민족을 축복해 주시기까지 하셨다. 한이 있는 한 한민족은 언제나 종교적 민족으로 남으리라. 경제력이 지금의 5배 또는 10배로 성장하더라도 그러하고 교육수준이 세계 최고를 기록한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오, 복스러운 한아! 그대 아니었던들 과연 한민족이 이토록 하느님을 열렬히 찾았겠는가? 그대 아니었던들 과연 한국 국민이 영원한 가치와 내세를 이토록 열렬히 동경하였겠으며 절대자를 향해 이토록 힘차게 떼지어 걸어갈 수 있었겠는가? 오, 하느님의 사자 한아! 제발 우리를 떠나지 말아다오. 그대 있기에 나는 그대를 보내신 분을 체험하며 지내노라. 그대 있음에 한민족은 축복받은 민족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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