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세상 살다 보니 어느덧 70 고개를 넘어 77세. 노인 중에서도 A급에 이르렀다. 천주교에 입교한 것은 6·25 때 부산으로 내려가서 초량(草梁) 등에 살 때 일이지만 가톨릭 문인회를 이끌어 마음을 가다듬던 추억은 참으로 보람을 느낀다. 종군 작가(從軍作家)단이 조직되고 전선으로 자주가게 되니 그 위험률은 자못 컸다. 북괴군이 후퇴할 때 묻어 놓고간 지뢰(支雷) 지대는 이루 가려낼 수 없고 공병대에 지뢰 탐지기는 있었지만 작전상 필요한 과업에 분망하니 어느 여가에 종군 작가를 위해 제거 공작을 하겠는가.
그러나 부산에 집결된 문인들은 날로 늘어서 국방부 정훈국에 종군작가단 (從軍作家團) 이 조직되고 정훈국 (政訓局) 문관 (文官) 으로 있던나는 자동적으로 작가단 단장이 되고 한달에 한번씩은 일선으로 가서 생생한 현지 형편을 보살피게 되니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뛰는 젊은 애국자 들이었다.
크리스마스 임시하여 나는 초량천주교회에 입교 준비를 하노라니 도무지 경문(經文)을 외우기가 어려워서 고민을 하던 차 일선으로 떠나가는 전날 밤 아내는 기쁜 소식을 전해왔다.
미국 신부님 말씀이 위험한 일선으로 가는 사람이면 특별히 세(洗)를 주신다는 것이다. 덕분에 나는「요셉」이라는 본명을 얻고 비로소 천주교인이 된 것이다. 덕분에 오늘까지 천주님의 은총 그늘에 평화로이 살지만 명색이 종손이라서 제사를 못 지내게 되니 그냥 있을 수 없어 가족회의를 열고 상의한 결과 요행히 만장일치로 모두가 천주교를 믿자는 결론이 있어 우리 일족은 모두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그 후 서울에 돌아와 더욱 많은 가족들의 동의를 얻어 그야말로 영광스러운 천주교의 가장이 된 것이다. 사람의 심정이란 다 그런 것, 무슨 어려운 고비를 넘길 때마다 차츰 인생살이의 지혜가 개발되고 옳고 바른 길을 찾게 마련이지만 나는 40이 넘어서 비로소 종교의 거룩함을 깨닫고 수많은 종교 중에 천주교 신자가 된 것이다.
그 후 서울이 수복된 후 이산가족이 모두 모인 기회에 천주교에 대한 나의 설명에 호응, 전부가 천주교 신자가 되는 영광을 얻었다. 인제는 70이 지나 80에 가까우니 판공성사 때가 되어도 신부님 앞에 나아가 뉘우치고 후회하는 일이 별로 없으니 이 또한 천주님께 강복 받은 것이다.
착한 마음 올바른 처신에서 빛나는 인생이 이루어진다지만 이 같은 사고는 젊은이에게는 너무나 이르고 적어도 중년부터인가 싶다.
이제는 지내온 긴 세월에서 뉘우치는 일을 고루 찾아서 한 건 한 건씩 정리하고 가다듬어 머지않은 선종(善終)의 날을 기다릴 뿐이겠지만 살아갈수록 역겨운 일이 너무나 많아 그것을 무난히 가다듬고 달래노라니 때로는 화도 나고 눈물도 나지만 여생(餘生)을 조용히, 깨끗이 끝내자니 새삼 정신을 가다듬기에 여념이 없다.
늙어서 비로소 후회되는 젊었을 적의 회고는 이루 헤아릴 길이 없으니 무슨 수로 깨끗이 청산을 할 것인지 때로는 눈물까지 흐른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가야 할 죽음의 길이라면 두려워 말고 피하려 하지 말고 의젓하게 떳떳하게 선종할 차비나 든든히 하는 수밖에는 아무 대책도 없을 성싶다.
이런 때 지극히 요긴한 것은 종교이다. 아무런 고민 어떠한 울분이 있을 때라도 벽 위에 모신「고상」앞에 무릎 꿇고 눈 감으면 마음은 가라앉고 성모님의 따뜻하신 손길이 구멍 난 상처를 어루만져 주심을 느낄 때, 그때 비로소 마음은 가라앉고 인생은 엄숙히 여겨진다. 이거야말로 강복 중에 으뜸가는 강복인 성싶다. 울지 말자. 화내지 말자. 울컥 치솟는 울분을 조용히 가라앉히고 조용히 성모님의 따뜻한 사랑에 젖어보자.
▲지금까지 맹광호씨께서 수고해 주셨습니다. 이번호부터는 이서구씨께서 집필해 주시겠습니다.
<편집자 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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