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체를 손으로 받아 모시는 방법이 채택된 후 신자들의 성체를 영하는 모습이 실로 다양해졌다. 제대로 교육이 안 되어 그런지 시간이 더 걸리는 불편이 없지 않다. 여전히 혀를 내미는 신자가 있는가 하면 손으로 성체를 받기 직전에 성호를 엄숙히 긋는 사람도 있다. 오른손으로 왼손을 받친 채 성체를 받았으면 즉시 옆으로 비켜나서 뒷사람에게 지장을 주지 않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 ▲무엇보다 시간을 지연시키고 딱해 보이는 것은 굽신거림이다. 성체를 받으려는 순간 우선 두어 번 굽신굽신한 후 성체를 받곤 또 굽신거린다. 자세히 살펴보면 40대 이후 신자들 가운데서 이런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살을 손으로 받는 순간인데 황공무지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면 그 굽신거림을 이해할 수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이 같은 굽신거림이 곧 공경의 표현일까 반문해보지 않을 수 없는 점이 있는 게 말이다. 수백 년간 관존민비사상에 찌들어 습관화 돼버린 비굴함을 엿보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굽신거림이 체질화돼 있다는 인상이 너무나 강하게 풍기는 것이다. 손아래 사람이 아니면 무조건 굽신거리고 보는 자세 단순히 예의라고 미화시켜 버릴 수 없는 자세를 보고 서글픔을 느낄 때가 없잖아 있다. ▲이 같은 굽신거림은 경직된 사회 속에서 살아남은 하나의 처세술일 수도 있을 것이다. 경직된 사회는 굽신거림을 요구하고 그 굽신거림이 곧 질서로 통하기 마련일 수가 많다. 최근 D일보 사설은 이렇게 개탄하고 있다.『우리 사회는 어느 모로 보든지 경성(硬性)사회인데도 사회 기강의 문란은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있다』 ▲어떻게 보면 사회 기강이 개선되지 않는 것이 당연한 귀결인지 모른다. 경성사회는「자율적이고 책임있는 행동양식보다는 타율적이고 무책임한 행동양식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타율적이고 무책임한 행동양식은 곧 굽신거리기부터 하는 행동양식과 직결되지 않을까. 이번 이리시 폭발사고만 해도 그렇다. 사고의 원인은 화약물 취급에 관한 그 많은 엄격한 법규와 수칙들이 송두리채 무시되고 묵인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한국화약」의 방자(放恣)함과 그 방자함이 풍기는 권력(?)에 철도 관계자와 경찰이 우선 굽신거리기부터 했기 때문이었다면 지나친 추측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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