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혼자 죽어야 한다. 아무도 나를 대신해서 죽어 줄 수 없다. 사랑하는 부모도 가까운 애인도 내 죽음을 슬픔 속에 지켜볼 수는 있어도 나의 죽음을 대신하지 못한다. 죽음은 나 혼자 하고만 관계를 갖는다. 우리는 죽음에서 인간의 개체성의 엄연한 한계에 부딪힌다. 죽음은 남이 어떻게 해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일이요, 나 혼자만의 일이다. 나밖에 관여할 수 없는 나의 실존적 상황이다. 사랑하는 어린 자식이 병에 걸려서 열이 40도를 오르내리며 조그만 심장이 할딱거리는 참상을 보고『나로 하여금 이 어린 생명의 병을 대신 앓게 해주소서』하는 간절한 기도를 부모들은 하느님께 드린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인생은 개체로 태어나서 개체로 감각하고 개체로 살다가 개체로 죽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저마다 자주 독립의 사회적 원자(原子)이며 죽음 앞에서는 부모 처자도 남이다. 파스칼이 말한 것처럼『사람은 혼자 죽는다. 그러므로 사람은 혼자인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우리는 태어날 때 혼자 태어나고 죽을 때 혼자 죽는다.
죽음은 경험을 거부하는 세계다. 우리는 절대로 죽어볼 수 없다. 인생의 모든 일은 다 경험해볼 수 있지만 죽음만은 경험해볼 수 없다. 우리는 사랑도 해보고, 공부도 해보고, 성공과 실패도 해본다. 생은 경험의 과정이며 연속이다.
그러나 죽음만은 절대로 경험해볼 수가 없다. 우리는 서로 다툴 때『너 한 번 죽어 보겠어?』하고 말한다. 이것은 절대로 거짓말이다.
사람은 죽어볼 수는 없다. 우리는 죽어보는 것이 아니고 죽어버리는 것이다. 죽음은 인생에 두 번 있을 수 없는 1회성의 현상이다. 알파인 동시에 오메가요 처음인 동시에 마지막인 현상이다.
물론 우리는 남이 죽는 것을 보고 어느 정도 죽음의 현상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고 인식할 수 있다. 심장의 고동이 멎고 맥박이 끊어지고 괴로운 경련이 일어나고 신체가 싸늘하게 경화(硬化)하여 생명 없는 물체로 화하는 것을 본다. 그러나 그것은 객관적으로 관찰된 죽음의 현상이지, 우리가 주체적으로 체험하는 실존적 현상은 아니다.
우리는 절대로 죽음을 앞지를 수 없다. 우리는 죽음의 이쪽은 보아도 저쪽은 보지 못한다. 죽음은 인간의 엄연한 한계 상황이다. 우리는 시시각각으로 죽음과 마주 서서 살아간다. 죽음은 그림자처럼 삶을 따라다닌다. 생(生)은 언제나 죽음을 업고 다닌다. 아침에 집을 나간 사람이 저녁에 시체가 되어서 돌아오고 어제까지 멀쩡하던 이가 오늘은 불귀의 객이 된다. 우리는 모두 죽음의 선고를 받고 그 중의 몇 사람이 매일 딴 사람이 보는 앞에서 죽으며 남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운명이 그들의 운명과 같은 것을 보고 비애 속에 희망도 없이 서로 얼굴을 바라보면서 자기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 죽음은 생(生)의 부정이요, 생의 종말이다. 이것이 죽음의 제일 중요한 속성이다. 죽음은 생에 종지부를 찍는다.
죽음은 일체의 지상적인 것과의 결별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모든 것을 버리고 아끼고 계획하던 모든 것을 두고 지상에서 사라져야 한다. 날마다 쳐다보는 푸른 하늘 사랑하는 부모 형제 믿고 아끼는 친구들, 애지중지하던 인생의 계획, 정이 붙은 온갖 소유물, 한 말로 모든 것을 두고 우리는 어디론가 혼자 떠냐야 한다. 인간은 불사(不死)를 바라고 영원히 살고 싶어한다. 그런데 인간에게 왜 죽음이 있을까? 이는 죄의 값이다. 신의 뜻을 거역한 아담의 죄의 대가로 죽음의 멍에가 인간에게 영원히 메어진 것이다. 우리는 죽음 속에 내어 던져진 존재다. 인간의 생은 그 처음과 중간이 아무리 행복하다 하더라도 그 피날레(종장)는 반드시 비극의 장이다. 인생은 죽음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음에 대하여 세 가지 기본적 감정을 갖는다. 공포 비애 허무의 감정이다. 우리는 이 세 가지 감정 때문에 죽음을 싫어하고 죽음을 미워한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허무와 비애의 감정을 어떻게 처리하고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 죽음 앞에 태연자약하고 안심할 수 있는 길을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가? 그것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죽음은 아무 예고도 없이 홀연히 우리를 찾아온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한계 상황」이다. 죽음이 인생의 필연의 운명인 이상, 우리는 영웅적인 정신을 가지고 죽음에 대해 용감한 각오를 갖는 도리밖에 없다.
평소에 사생관에 대한 올바른 각오는 곧 굳은 결의를 가져온다. 철학은 죽음에 대한 연습이다. 선인들의 본보기는 우리를 위한 본보기였다. 지혜는 스스로 주체화 되어야 한다. 주체화 된 지혜로써 나의 생각과 행동에 빛과 힘이 되어 언제나 어디서나 나는 신 앞에 서 있어야 한다. 이렇게 느끼고 행동하는 것이 곧 죽는 연습을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생은 한 번뿐이다. 내가 지금 여기서 당하는 일과 만나는 사람에 대해서 언제나 나의 정성을 다하는 데 우리의 구원이 있고, 그것이 생의 지혜요, 또 죽음에 대한 준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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