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동학농민전쟁에서 농민군은 봉건지배층의 수탈과 외국상인들의 상권침해를 저지시키고 평민ㆍ천민신분을 봉건지배층의 예속으로부터 해방시켜 평등사회를 실현시티는 것을 그 목표로 전국단위의 지배군력의 장악을 꾀하였으나 실패했고 한반도가 구미일 열강제국의 각축장으로 변하자 전국 각지에서 소농ㆍ빈농ㆍ물락 농민이 중심이 되어 구미일 제국주의 국가들 및 그들과 결탁한 봉건적 관료ㆍ지주ㆍ상인세력 등 매판적 집단을 대항하여 의병전쟁을 벌였으나 1910년 한일합방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상의 민중적 민족주의의 발로인 동학농민전쟁과 의병투쟁이 일제하 독립운동과 독립군 저항으로 이어졌으며 그 정신의 흐름은 4ㆍ19혁명과 5ㆍ18민중항쟁으로 활화산처럼 분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앞으로 몇 년간은 우리 민중적 민족주의 실현의 획기적인 계기가 될 것이 기대되고 있다.
이 같은 전환기에 서서 생각해보고자하는 점은 폭력의 정체와 본질이 무엇 인가하는 점과, 폭력에 대한 반작용인 저항도 폭력 인가하는 점이며, 비 폭력 저항이 따로 있고 폭력저항이 따로 있는가하는 점이다.
먼저 폭력의 정체와 본질은 무엇인가? 인간차별과 인간멸시와 인간증오와 이기심과 명성욕과 지배욕과 자기중심주의와 자기 가족ㆍ가문ㆍ단체ㆍ집단ㆍ지역ㆍ종족ㆍ피부색ㆍ국가ㆍ문화ㆍ종교중심주의와 그에 따른 행동과 물리력으로 나타난 폭행과 가해와 직접간접 갖가지 간교한 수단으로 인간노동의 결실을 가로채는 행위와 경제독점과 권력독점과 자본주의 이념을 빙자한 경제ㆍ군사적 침략과 억압과 착취에 의한 우익 제국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이념을 앞세워 인간의 자유 인권과 창의를 짓밟고 인민을 노예화하려 획책하는 일당독재 전체주의와 전 세계 인민과 민중을 해방시킨다는 미명하에 세력권을 확장해가려 하는 좌익 제국주의와, 한마디로 불의가 폭력이며 체계적이고 기계적이고 조직적이고 구조적이고 정교하게 짜여 지고 모든 사람, 각 사람을 옴짝달싹할 수 없게 그 세력권 안에 가두려고 음모를 꾸미는 악마적 세력이 폭력의정체이며 본질이다. 인간차별ㆍ멸시ㆍ증오에서 나오는 힘의 행사와 공격이 폭력이며, 그 폭력에 저항하는 행동과 투신과 연대와 갖가지형태의 실력행사는 그것이 인간의 평등한 존엄성존중ㆍ사랑의 발로인 한에서는 결코 폭력이 아님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다음 저항의 방법에 있어서 샤를르들푸꼬와 마더데레사와 그 작은 형제자매들이 당신 머리하나 편히 누일 자리로 없었던 스승 그리스도처럼 먼저 소유와 소비생활수준에서 헌신의 대상인 가난한 사람들 및 병든 사람들과 완전히 동일화(同一化)되어 그들에게 노동과 땀을 바쳐 헌신하는 자세는 제도화된 불의의 폭력에 저항하고 발본색원하려는 온갖 투신과 연대의 필수불가결한 출발점인 것이다.
그리고 마하트마 간디와 마르틴루터킹 같은 많은 사람들은 이른바「비 폭력저항」의 도덕적 힘으로 온 세계 민중과 연대하여 사회적ㆍ역사적 불의인 폭력을 제거하려고 기도한다. 간디의 방식대로 아닌게 아니라 민중의 상당부분이 자각하여 침묵 중에 단식을 한다든가 총 파업을 단행하고 앉아있으면 그 이상 무서운 것도 별로 없으리라. 루터 킹은 억압과 착취를 당하는 민중의 5%만 감옥에 들어갈 각오를 가지고 비 폭력저항을 강행한다면 승리는 반드시 오고야 말리라고 확신한다. 그들은 악의 세력이 아닌 구체적인 인간에게 증오와 복수심을 가지고 대적한다는 것은 증오와 불의가 폭력의 본질이기 때문에 폭력을 또 다른 폭력으로 맞선다는 이율배반으로 되며, 그럴 경우 폭력의 악순환으로 치닫는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2차 대전 당시 히틀러의 유태인 설멸작전이나 일본 관동지진 때 한국인 무차별 학살사건 같은 것도 있을 수 있고, 국제적이고 국내적인 폭력체제가 민중을 극한적인 한계상황 속으로 몰아넣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까밀로 토레스 같은 사람들은 극히「절망적인 한계상황」에서는 기존의 정치ㆍ사회ㆍ경제적 구조 자체를 뿌리째 전복시켜 바꾸어놓기 위해 혁명적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강한신념을 가지고 있다. 합법적인 온갖 수단이 모조리 막혀버리는 한계상황에서 인간사랑은 혁명적 투쟁을 통해서만 구체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최신판 군사ㆍ경제적 제국주의의 마수가 완벽하게 제 3ㆍ4세계 민중을 질식시키는 한계상황에서는 투력항쟁의 수단 밖에 남지 않을 수도 있다는 논법이다. 그러나 이 입장은 구체적인 상황을 떠나서 보편적인 도식으로 되어 질 수는 없으며,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로 제시된 방식과 틀을 벗어나 결국 사랑과 용서와 와 화해가 아닌 증오와 복수라는 폭력에 의지하는 자가당착에 떨어질 위험이 상존하고 있다. (사랑 없는 정의가 있을 수 없고 증오와 불의와 폭력은 일체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구체적인 상황들에 대한 속단은 금물이며 과연 그런 한계상황임을 누가 어는 시점ㆍ지점에서 단정 지을 수 있는가를 곰곰 되새길 일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