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살려면 그릇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풍작이 돼도 이것을 담을 그릇이 없으면 밥을 지을 수가 없으니 말이다. 기실 표현이 다를 뿐이지 위는 음식을 담는 그릇이고 폐는 공기의 그릇이다.
이렇게 유무형을 막론하고 그릇이 있어야 살 수가 있으며 따라서 그릇이 온전해야 함은 물론이다.
아무리 진수성찬이 있어도 위가 헐면 음식을 먹을 수가 없고 신선한 공기가 있어도 폐가 나쁘면 그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자루가 새면 때우듯이 위장병이 나면 약으로 고치는 것이다. 왜 이런 유치한 문제를 거론하는가 하면 사람들은 양심을 고치지 않고 평화를 원하니 말이다. 본래 하느님이 인간에게 양심을 주신 것은 평화를 보존하기 위해서이다. 쉽게 말해서 어항은 물을 담고 금붕어를 넣어 그것을 보며 즐기기 위한 것인데 돌이나 쇳덩이를 넣으면 깨지니 다시는 물을 넣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양심은 믿음이란 물을 넣고 평화 속에 진리와 정의가 자유롭게 살아 행복하게 살기 위한 것인데 믿음은 쏟아버리고 물질인 황금을 그것도 조심성 없이 넣으니 그 양심이 온전할 리가 만무한 것이다.
그렇다면 배탈이 난 자녀에게 떡, 고기를 주는 부모가 없고 새는 그릇에 기름을 담지 않고 양심이 평화를 보존할 수가 없는데 어떻게 하느님이 그것을 주실 것인가? 더구나 물을 가마니에 담을 수가 없다면 평화는 욕심에 불가한 것이다. 바가지는 물을, 조리는 쌀을 건지기 위한 것처럼 양심은 평화를 욕심은 진리를 위해 주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양심에는 황금 물질을 담고 욕심으로 평화를 건지려 하니 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조리로 물을 마셔야 가능한 일이다. 알다시피 북한은 하루아침에 집과 문전옥답을 주었으나 부족해서 총칼 들고 남침을 하였고 우리 중에는 억대의 재산을 가지고도 부족해서 부정과 탈세를 하니 그 욕심에 평화가 있을 것인가?
그러나 양심은 한도가 있기에 적은 것 가지고 만족하기에 평화로운 것이다. 예컨대 독이 온전하면 물 두지게로 차면 더 받아들이지 않듯이 바른 양심도 누가 돈을 짐으로 져다 줘도 받지 않게 된다. 그러나 일단 독이 깨지면 동네 샘물을 다해도 채우지 못할 뿐 아니라 부엌이 물바다가 되듯이 양심에 구멍이 나면 세상을 다 줘도 채우지 못하고 그것이 죄악의 바다가 되기에 불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우물이 뜰 안에 있듯이 평화는 마음속에 있지만 쪽박의 양심도 없기에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더구나 사막에서 쪽박이 없어 머리를 숙이고 엎드려야 물을 마신다면 불신의 사막에서 그 양심도 없다면 겸손의 자세를 취해야 평화가 가능할 것이다. 요는 독을 때우지 않고 물을 담을 수가 없고 양심을 고치지 않고 평화는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조리를 놓고 바가지를 들면 물을 마실 것이고 욕심을 양심으로 바꾸면 평화는 오늘도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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