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침대 벽 위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걸어 놓았다. 내가 영세하던 날 부산 초량본당 권 신부(美國人)님이 주신 내력이 있어서 더욱 소중히 모셔놓고 있지만 정작 권 신부님은 노후에 미국으로 들어가 은퇴생활을 하시더니 이제는 소식조차 알 길이 없다. 90이 가까운 분이시니 선종을 하시었는지도 모른다. 밤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반드시 한국식으로 무릎을 꿇고 십자가 앞에 경의를 표하고 주모경을 몇 번이고 외우고 나서 눕는다.
뿐만 아니라 괴로운 일이나 뉘우칠 일이 있을 때에도 나는 반드시 십자고상 앞에 공손히 무릎 꿇고 묵념을 올린다. 6·25 남침 때 부산으로 내려가 깨달은 바 있어 입교를 했지만 내가 영세하기까지에는 여러 가지 사연이 있어 상념은 더욱 간절하다.
그때 서울에서 지내던 문학인들은 6·25가 터지자 우익과 좌익이 분명히 갈라졌으며 좌파는 서울에 남아 있고 우익은 모두 남하하였다. 대구와 부산에서 피난살이에 고달프기도 했지만 부산에서 권 신부 같은 갸륵한 분을 만나뵙게 된 것만은 참으로 기쁘고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때 나는 남하한 극작가를 중심으로 종군 작가단을 창립하여 국방부 정훈국에 나가 일선에서 취재한 사연을 희곡 등으로 써서 발표를 하였지만 당시의 일선 종군이란 매우 위험하여 출발할 때마다 가족들은 몹시 불안해하였다.
6월 그믐에 남하한 피난민들은 하는 수 없이 부산에서 성탄절을 맞이하게 되었고 나는 초량성당(평양에서 남하한 성당) 이웃에 있는 방 하나를 얻어서 살게 되었는데 언덕길 좁은 골목을 오르내리노라면 백발이 깨끗한 서양 신부님이 아침마다 언덕길을 몸소 깨끗이 쓰는 것을 보고 놀랐다.
『과연 성직자는 다르구나』하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러는 동안 남하한 문인들은 차츰 그 수가 늘고 일선 종군을 원하는 이가 많아서 그들과 함께 한창 바쁘게 지냈다. 성탄절을 앞두고 나는 또 위문품을 가지고 일선으로 가게 되었는데 아내가 하는 말이『천주교에 나가고 싶어서 성당에 가서 신부님을 만나뵈었는데 미국분이지만 참 점잖고 따뜻하시어요. 그 신부님에게 우리 식구가 모두 입교할 생각이라고 말씀드렸더니 기뻐하시면서 일연에 종군을 나간다니 곧 세를 줄 것이니 남편과 같이 오라시니 가십시다』하는 것이 아닌가.
뜻밖의 특전이다. 포연탄우가 쏟아지는 계속으로는 사람에게는 그럴 수도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산에 모인 우리집 식구는 전원이 세례를 받았다.
그때 신부님이 주신 묵주는 오늘까지 소중히 간직하고 있지만 기도를 드릴 때마다 손바닥에 숨어드는 묵주알의 촉각에서 항상 권 신부님의 어지시고 따뜻한 인품이 되살아나 무한히 흐뭇하다. 우리 주변에는 여러 종교가 있어 종교를 선택하는 데도 힘이 들었지만 나는 다행히 권 신부 같으신 어질고 따뜻하고 밝은 분을 만나서 곧장 초약성당에서 세례를 받고「요셉」이라는 본명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 우리 가족은 전원 신자가 되어 마음 편히 살게 되고 보니 권 신부를 그리는 마음 자못 간절하다.
종교란 누구나 자유로이 선택하는 것이지만 나는 어쩐지 권 신부님 덕에 천주교 신자가 된 것 같아서 그분을 그리는 마음 한층 더 간절하다.
어제도 오늘도 잠자리에 들기 전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합장을 하고 눈을 감으면 그때 그 시절에 만나뵙던 모습이 떠올라 무한 흐뭇하다. 이런 일을 겪고 있는 나는 하루하루를 마음 편히 지내게 되니 이 또한 지대한 강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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