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 교회와 신자들이 타성 속에서 대체로 잊고 지내는 한 가지 중대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북한에 있는「침묵의 교회」이다. 국토 분단이 우리 민족에게 가장 비통한 현실이며 따라서 통일이 민족의 지상과제인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교회를 가장 비통하게 생각해야 하며 하루 속히 북한에 하느님의 교회를 재건할 수 있기를 기원해야 한다.
이러한 때에 천주교 평양교구 창설 50주년 기념행사가 서울에서 열린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다.
천주교회가 평양에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일찌기 산명모루(山明隅) 마을에 공소가 설치된 이후의 일이지만 1927년에 정식으로 평양교구가 설립된 때로부터도 벌써 반세기의 역사가 흘렀다.
평양교구는 서울대교구 바로 다음으로 설정되지는 않았지만「평양」이라는 지역의 중요성이 바로 서울에 버금가게 한다.
그 비중을 의미하듯 방인주교의 탄생 순위로 보면 1942년의 서울교구 허기남 주교 의좌에 이어 1944년에 두 번째로 홍용호 주교가 평양교구에서 탄생하였다.
그리고 지금도 평양은 북한 정권의 수도라는 점에서 분단된 북한 침묵의 교회의 중심지로 여겨지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평양교구를 생각하면서 바로 북한 교회를 연상하게 된다. 이 점이 우리가 평양교구에 붙이는 첫 번째의 의미이다.
평양교구가 그 요람기에서부터 해온 일들과 겪어온 어려움들은 역사상 두드러지는 바가 있다.
일찌기 구한국시대에 이른바 문명의 개화를 위해 신교육 기관들이 설립될 때 이 지역에서 천주교회가 영청학교 기명학교 성모여학교 등을 설립하였다. 이것은 같은 무렵 개신교 쪽에서 세운 학교에 비하면 적은 것이지만 그럴수록 천주교회 안에서는 소중한 것이었고 또 선구적인 것이었다
교육면의 공로 다음으로 평양교구가 천주교회 안에서 이룬 공로는 홍보활동의 면에 있었다. 1934년에 평양교구가 창간한 월간잡지「가톨릭 연구」는 이어서「가톨릭 조선」으로 개명되었는데 이것은 서울교구의「가톨릭청년」지의 선구가 되었다. 이러한 출판 활동은 그 교구운동을 반영했다는 점에서도 의미를 지닌다.
다른 한편으로 평양교구가 어깨에 메고 온 숭경한 역사는 현대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 대표적으로 겪은 박해사이다.
평양교구는 1923년 이래 미국 수도회인 메리놀회가 관장하는 사목ㆍ사업 아래 있었는데 1941년에 태평양전쟁이 일어나니 일제는 이 교구의 메리놀회 소속 주교신부 수사 수녀들을 연금시켰고, 이듬해에는 이들을 본국인 미국으로 추방하였다. 다시 1944년에는 주교좌성당인 관후리 교회 및 부속 건물이 일군에 징발되는 사태마저 겪었다. 이것은 일제에 의해 천주교회가 겪은 박해의 대표적인 사례였다.
1945년에 민족이 해방되어 평양교구는 일제의 횡포를 면하게 되었으나 이번에는 다시 유물수적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박해를 받게 되었다. 소련군이 진주해 있는 북한에서 공산당은 처음부터 교회를 적으로 여겨 증오하고 탄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평양교구의 교회 당국과 신자들은 오히려 더욱 왕성하게 신앙에 불타올랐다. 그리하여 해방 이듬해에 관후리 주교좌 대성당 신축을 위한 기성회를 조직하여 공사에 들어갔고, 교구 내 곳곳의 신자들은 자신들이 먹을 쌀까지 가지고 평양으로 몰려와 성당 건축공사에 봉사노동을 하였다. 그 결과로 1948년에 마침내 대성당은 훌륭하게 완공되었다. 그러나 이 해 12월에는 교회 건물 양도를 강제로 명령하였다.
홍용호 주교는 공산당의 이 성당 강탈행위를 지탄하는 항의서를 김일성에게 보냈고 그 뒤 가두에서 공산당에 납치되어 행방불명이 되었다. 이어서 교구 내 신부 수녀 회장들이 계속 체포되어 갔다. 특히 1940년의 6ㆍ25전쟁에 평양교구와 북한 내의 다른 천주교 그리고 개신교를 포함하여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의 행렬을 이루어 갔다.
이 무렵 평양교구로부터 탈출하여 나온 천주교 성직자는 강현홍 신부 1인뿐이었다. 탈출해온 강 신부는 1949년에 월남한 평양교구 신자 유지들과 더불어 서울에서「평양교구 신우회」를 조직하였다. 그 뒤 이「평양교구 신우회」는 수복하여 재봉할 평양교구를 위하여 교구 출신 신학생 양성사업에 큰 힘을 기울였다. 평양교구 출신으로 오늘날 남한 천주교 안에는 주교 3인 신부 28인이 있어 각기 맡은 바 성무에 봉직하고 있다.
1975년 6월 이대로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이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임하고 있는 것도 북한 교회 수복을 기대하는 거시적 자세를 상징하고 있다. 민족의 비원인 국토 통일과 더불어 우리 교회와 신자들은 북녘「침묵의 교회」와 그 땅에서의 수많은 순교자들을 망각하지 않는 일상이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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