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중에 도토리란 별명의 애가 있었다. 또록또록한 눈매에 오뚝한 콧날이 누가 봐도 영리하고 야무져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녀에겐「도토리」란 별명 외에「마이크」란 또 하나의「닉네임」이 붙어있었는데 목소리가 어떻게 큰지 그애가 우리집엘 오면 대번 온 집안이 떠들썩 해지곤 했다. 죄끄맣고 귀여워보이는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크고 급하고 어수선한 말소리여서 그 애가 지껄이고 있는걸 듣고 있으면 흡사 재봉틀 바퀴가 덜덜덜덜 돌아가고 있는 곁에 앉아있는듯 했다. 나는 그 애와 한동리에 살며 국민학교를 같이 다녔고 같은 중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각기 다른 대학엘 들어갔으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친했다. 얌전한 구석이라곤 한군데도 없고 여성답고 섬세해보이는 점이라곤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는 친구였지만 그래도 나는 그 애를 몹시 좋아했다. 유모어와 재치가 뛰어나 그 애랑 얘길하고 있으면 무지 지루하지가 않았다.
특히 내가 그 애를 좋아했던 까닭은 그 애의 티한점 없어 뵈는 순결하고 맑은 성품 때문이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다른 아이들에겐 무언가모를 세파의 땟국이 묻어가고 있었지만 이 애에겐 도대체 그런 기미가 없었고 그저 담백하고 순수하기만 했었다. 그런 그녀에게도 어느날 드디어 애인이라는게 생기는듯 했다.
대학 3학년 끝무렵이었는데 그애가 어떤 모임에서 알게됐다는 청년은 키가 크고 미목이 수려한 은행원이었다. 그녀와 나란히 서면 애인이라기보다 그녀 아버지벌쯤 되어보이는 남자였다.
그녀에게 애인이 생긴뒤부터 우리들의 화제는 자연히 그 은행원 아저씨에게로 집중되었는데 그녀가 옮겨다주는 얘기속에서 나는 점차 그녀의 가슴속에 따뜻하고 향기로운 사랑이 움돋고 있음을 알아챌 수 가 있었다.
그런 어느날밤 그녀는 새카맣게 질린 얼굴로 나를 찾아왔다. 그 남자와 사귄지 1년이 넘어갈 무렵이었다.
나는 그녀의 불안하고 겁먹은 안색에 놀래서 무슨일이 있었느냐고 황급히 물었다. 그녀는 울먹울먹하면서 그날밤 일어난 일을 내게 털어놓았다.
그날밤 그녀는 그 은행원 아저씨와 영화구경을 갔었노라고 했다. 그런데 한참 화면에 열중하다가 보니 어느곁에 자기의 손이 그의 무릎 사이에 들어가 있더라는 것이었다. 어째서 자기 손이 그 불결하고 부끄러운 곳에 가있었는지 그녀는 도통 알 수가 없는 노릇이지만 괴롭고 창피해 견딜 수가 없다는 것이였다.
나는 누누히 그녀에게 그것은 네가 모르고 한 일이니 결코 죄가 될 수 없다고 위로하고 납득시키려 했지만 그녀의 겁에 질린 얼굴은 풀리지가 않았다.
이튿날 아침 나는 그 애가 하이얀 미사보를 쓰고 고백소 앞에 서있는걸 보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세상의 어떤 꽃보다도 더 아름답고 순결해보였다.
그 뒤 나는 그녀가 더욱 더 좋아지는것 같았다.
결국 그 애는 그 은행원 아저씨와 길고 깨끗한 연애끝에 결혼을 해서 지금은 남편이 된 그이의 임지(任地)인 먼 외국에 나가있다.
그 애는 어디가 살든 그런 마음씨로 살 것이며 그 마음씨만큼의 축복이 항시 그녀를 따르고 있으리라는 것을 나는 믿는다.
더많은 젊은이들이 그녀와 같은 사랑을 하여 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 얘기를 적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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