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삼 세월의 덧없음을 본다. 도심지 거리는 구세군의「자선남비」종소리가 요란하고 세모를 재촉하듯 시민들 발걸음도 무척 바빠 보인다. 한 해가 다 가는 이달, 그리스도의 성탄을 준비하는 몸과 마음이 더욱 바쁘고 고단한 것은 웬일인가.
바로 1년 전 나는 그래도 신품 받은 당해 새 신부로서 처음 맞는 성탄절을 열심히 준비하고 잘 맞이하고자 무던히도 애썼는데, 느닷없이 손님이 찾아왔다.
밤 8시가 좀 넘었을까 갑자기 이상한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지명 수배자로 쫓기고 있는데 누이가 수도자라서 그의 충언을 받아 자수하기 전에 고백성사를 보아야겠단다. 서품된 기쁨과 보람에 묻혀 있어야 할 젊은 신부가 이를 쉽게 거절할 수 있을까. 30분도 채 못 되어 얼굴은 좀 핼쓱했지만 적당한 키의 미남형 젊은이가 내 앞에 나타났다.
머뭇거리며 사무실로 들어오지는 않고 밖에서 보잔다. 자칭 마태오는 성당에서 고백성사를 받겠다는 것이다. 캄캄한 밤에 섬찟한 두려움을 느끼며 성당으로 가서 고백소에 불을 켰다. 이때처럼 사제가 혼자인 고독을 뼈저리게 체험한 적은 아직 없다. 마구 울기만 하여… 사죄경을 염해 주고 한 시간 남짓 성체조배와 구유 경배를 하였다. 얼마나 진지한 기도요 탄원이었던가. 성당 문을 나서 보니 며칠을 굶은 탓에 술과 물만으로 채워진 배는 잔뜩 부풀어 있었고 정신적 고민을 감당할 수 없어 동맥을 끊으려 한 그 흔적은 처참하기까지 하였다.
끓어오르는 연민의 정을 가누지 못하고 내실로 인도하여 저녁까지 지어다 주었다. 당년 32세로 서울에서 대학을 나왔으며 해외 여행 경력도 있고 강원도 ○○탄광의 보안 관계 책임자였다는 것이다. 양친도 생존해 계시고 갓 결혼한 부인과 단란한 가정을 꾸미고 있는데 직장에서 사소한 시비 끝에 사람을 죽였단다. 이런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보니 얼떨결에 그만 누이가 있다는 이곳 대구로 도주하게 되었다는 고백이었다.
내가 무엇을 도울 수 있겠는지 물었을 때 사고 현지 경찰서에 자수한다는 자수 권유서와 자기의 피를 현금으로 만들 수 있도록 혈액원을 알선해 달라는 것이 아닌가. 현금 3만 원이 당장 필요하다는 것이다. 가진 것은 없고 가까이 있는 신도에게 부탁하였다.
-그것은 나의「첫 경험」이었다. 아뭏든 그는 나의 곁을 떠나갔고 교도소에 들어가는 즉시 기별을 주겠다더니 또 한 해가 저물어도 여태 소식이 없다. 그런데 들리는 말로는 이곳저곳을 다니며 연 2년째 계속해서 같은 고백성사를 받고 있고 현금을 요구한다는 것이 아닌가.
나에게「첫 경험」을 안겨준 그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는가. 이 해가 다 가기 전에 그를 다시 만나고 싶다.
연말연시가 되면서 지나간「첫 경험」은 또 한 번 자칭 마태오를 만나야 한다는 절박함과 한없는 기다림을 남긴다. 시간을 내어 언제 교도소라도 다녀와야겠다.
▲지금까지 이서구씨께서 수고해 주셨습니다. 이번호부터는 최홍길 신부님께서 집필해 주시겠습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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