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할머니가 강원도 평강사실 때 그곳 신부님한테서 들은 얘기란다.
그러니까 아무리 줄잡아도 40년은 지나간 일이다.
그 얘기를 들은 사람은 비단 할머니 뿐만이 아니고 거기 살던 천주교 신자들이면 누구나 다 들었다는 그곳 신부님의 생생한 체험담이란다.
하루는 그곳 신부님이 주무시고 계신데 꿈에 어떤 분이 나타나 어서 일어나 아무 아무데를 찾아가 병자성사를 주라고 이르더라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난 그 신부님은 허둥지둥 채비를 차려가지고 밖으로 나오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칠흙같이 어두운 밤이라 지척을 분간할 수가 없더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희미한 빛이 돋혀 갈 길을 밝혀주어서 그 신부님은 무작정 그 환한 길을 따라 쉬임없이 걸었노라고했다.
그랬더니 드디어 산밑에 쭈그려붙은 조그만 오두막살이가 눈앞에 나타나더라는 것이었다. 어찌나 집꼴이 누추하던지 거기 도무지 사람이 살성 싶어뵈지도 않는 다 찌그러져가는 외딴집인데 창문에 희미하게 불기가 비쳐 신부님은 성큼 안으로 들어갔노라고 했다.
그랬더니 정말 까물거리는 호롱불 밑에 호호백발의 한 남루한 노파가 홀로 꿇어앉아 마지막 숨을 거두려하고 있더라는 것이었다. 신부님을 보자 노파는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자기의 죄 많았던 일생을 흐느끼며 털어놓더라고 했다.
자기는 퇴기(退妓)인데 젊은 한 때엔 뭇사나이들의 노리개로 기적에 몸을 담고 있었노라고 했다. 그런곳에 있다보니 자기 신분이 용납되질 않아 성당에도 못 나가고 같은 교우들한데도 따돌림을 받았지만 한시도 천주님과 성모님을 잊어본적은 없노라고 했다. 피치못할 사정으로 욕된 직업은 택하고 있었으나 장구채를 들때마다 속으론 주모경을 외웠고 사나이들에게 마지못해 손목을 잡힐때마다 이 죄인을 부디 용서해달라고 흐느끼며 하느님께 청했노라고 했다. 나이가 늙어 기적을 떠난뒤엔 이 오두막집에 묻혀 오직 참회와 기도의 세월을 살아왔지만 하도 부끄러운 인생이라 마음이 항상 괴로웠는데 이제 신부님을 만나 이렇게 병자성사를 받을 수 있는 은총을 입으니 이 이상 더 자기는 바랄게 없노라고 했다. 그리곤 노파는 평화로이 눈을 감더라는 것이었다. 그녀의 임종을 지켜본뒤 신부님은 그 오두막집을 나왔는데 몇발자국 걷다 뒤를 돌아보니 노파의 오두막집 위에 하늘에서 내려온 무지개발같은 현란한 광채가 꽂혀 있더라는 것이었다.
이 얘기는 결코 내가 꾸민 허구가 아니다. 신부님이 거짓말을 하셨을리도 없고 그 퇴기 노파도 거기 살았던 실제인물이며 그 얘기를 전한 우리 할머니도 그런 얘기를 스스로 꾸밀만한 역량도 근본도 없는 순박한 노인네다.
그렇다면 우리는 거기서 많은것을 깨달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지니고 산다지만 어느 누가 이 노파만큼 무한한 신뢰와 애정을 가지고 하느님과 친근히 살고있다 할 수 있겠는가.
신앙이란 외치고 떠든다고 되는 것이 아니며 거룩한 외관이나 빛나는 포상위로 측정되는 것도 아니다.
신앙의 심도란 각자의 가슴 깊은 곳에 숨기어진 은밀한 비밀이며 그것의 진정한 가치를 알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늘에 계신 하느님 뿐이다.
우리는 결코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려 할것도 없고 우리 자신의 선덕을 공표하려 애쓸 필요도 없다. 또 남들이 날 오해하고 조소한다 해서 슬퍼하거나 노여워할 것도 없다.
노류장화에 몸 담아 세인의 지탄과 모멸의 손가락질을 당하면서도 끝내 가슴속엔 백설같은 청백함을 간직했던 그 퇴기의 강함과 열정과 겸허와 인종을 우리는 어느때든 가끔씩 생각해보자.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