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다행스럽게도 한국교회탄생 2백주년을 기념하면서 많은 신자들이 우리교회가 하느님의 축복을 후하게 받고 있는 사실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103위나 되는 성인을 모시게 해주시고 교황님을 다녀가게 하신 것을 비롯해서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표적으로 주님께서 보여주신 우리 교회에 대한 특별한 사랑을 감각했기 때문이리라. 같은 이유로 2백주년은 내게도 매우 중요하였다. 그것은「축복에 넘친 한국 교회」라는 내 종래의 신념을 굳혀주기에 넉넉하였다.
외국에 나가봐야 나라 소중함과 고마움을 안다지만 외국교회를 둘러보면 우리교회의 다복함을 실감하게 된다.
아시아의 거의 모든 나라에는 우리나라처럼 성당이 많지 않다.『생겼다 하면 다방이요, 섰다 하면 교회다』이것은 해방 후에 우리가 자주 듣기도하고 간혹 우리 자신이 해보기도한 말이다. 다분히 빈축과 조소가 섞인 말이다. 교회라고 해서 다 성당은 아닌 것이고 오히려 그것은 주로 예배당을 두고 한 말임이 확실하지만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괜히 부끄러워졌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아시아 교회들의 삭막한 현상을 목격하고 나서는 달라졌다. 이제 나는 그 말이『섰다 하면 성당이다』라고 바꿔치면서 중단되지 않고 계속사람들의 입에서 흘러나오기를 간절히 바랄만큼 달라졌다.
구라파로 발길을 옮겨보면 우리 한국교회의 축복은 한층 더 두드러진다. 열렬하고 돈독한 대중신앙의 소산으로서 한 때 그 미려와 웅장을 자랑하던 많은 주님의 성전들이 황폐하여 이미 하느님의 찬미소리 그 안에서 들리지 않고 오직 지난날의 유물을 찾아다니는 관광객들의 발자국 소리만이 요란스러운 그곳의 실정이다. 일생에 세 번 만, 즉 영세 때와 혼배 때, 그리고 자기 자신의 장례 때에만 성당에 가는 신자들이 적지 않던 그 소위 가톨릭 국가에서 지금은 그나마 한 번도 성당에 가지 않은 채 일생을 마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그곳의 형편이다.
소위 전교지방이라는 굴레를 벗어 난지 오래되지 않아 아직도 젊은 열기를 기대할 수 있는 미국교회를 훑어본다면 우리 교회가 받고 있는 축복의 풍후함은 더욱 명백히 드러난다. 몇 해 전 방미 중에 어떤 미국신부들의 묵상회에 참석한일이 있다. 그때 나는 우리나라의 예비자수, 사제 및 수도 성소 등에 대하여 그들의 질문을 받게 되었는데 내 대답은 대략 이러했다. 그 당시 내가 소속해있던『서울대교구의 경우 예비자는 본당마다 1백 명을 웃돌고 연 2회 내지 3회의 입교식이 있다 사제성소는 3개 대신학교가 3백 명 이상으로 초만원을 이루고 있어 제4의 대신학교를 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수도성소는 갈멜 수녀원을 포함해서 수녀원마다 쇄도하는 입회지망자들을 모두 수용할 수가 없어 대기자 명단에 올려둔 사람이 많은 실정이다』이런 정도의 대답이었다. 이것은 결코 과장도 거짓말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들은『지금 그 말이 사실인가?』하며 의아해하는 표정들이었다. 알고 보면 그들에게 내말이 믿어지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
한 본당에 성인 영세자 수가 고작 한해에 2, 3명 정도인 그곳의 실정이니 한국의 이야기가 믿어지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매머드 수도원의 문이 닫히거나 세속 용도로 팔리고, 50세 미만의 수녀를 찾아보기 힘든 그곳의 상황이니 내 말이 믿어질리 있었겠는가. 우리의 기준으로는 1천명을 수용해도 남을 만큼 광대한 신학교에 고작 5, 60명 정도의 신학생 밖에 없는 그러면서도 그것을 대견스럽게 여기는 그곳의 형편이니 우리 실정에 놀라움을 드러낸 것도 무리는 아니다.
언제부터인지는 기억할 수 없지만 나는 꽤 오래전부터 우리 교회가 하느님의 남다른 축복을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조심스럽게 해왔었다. 그러다가 외국 교회들을 간혹 접하게 되면서부터 그 추측은『아니 분명히 축복을 받고 있다.』는 확신으로 바뀌었던 것인데 2백주년을 계기로 해서 이제 그 확신은 완전히 굳어져 버렸다. 알고 보면 한국교회는 참으로 축복받은 교회이다. 주님의 축복이 그 안에 넘쳐흐른다. 지금 우리는 축복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다만 이것이 남한만이 이야기인 것이 안타깝고 가슴 아플 뿐이다.
내가 오늘 축복받은 우리교회를 기림은 그 교회를, 더욱이 우리 자신을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직 좋으신 주님을, 우리에게 좋이 해주시는 그 주님을 우리 모두가 찬미하고 그분께 감사드려야 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나라들은 이미 하느님께 감사하기를 그쳤으며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받은 축복 속에서 서서히 병들어 가고 있었다. 받은 만큼 감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은 논리의 구사가 필요치 않은 매우 단순한 상식이다. 그런데 이상한 노릇이다. 축복이 크고 많을수록 사람은 감사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오만해져서 자기를 자랑하게 된다. 이것은 슬프게도 타락한 인간의 묵은 버릇이다.
우리는 축복해 주시는 주님께 늘 감사해야 하리라. 받은 축복에 상응하는 감사가 멎을 때 그 축복은 저주로 변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류의 원조로부터 시작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개인과 민족의 선례를 통해 익히 알고 있는 터이다.
그러니 축복받은 너 한국교회야, 늘 감사하여라. 그리고 변함없이 젊고 힘차 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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