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도 상해죄로 복역중인 청년이 2년간 숨겨뒀던 8건의 강도 범행을 자백, 마음의 죄를 씻었다는 뉴스가 화제거리다. 교도소에서 신부와 수녀의 감화를 받고 신자가 된 청년. 그는 단 1건의 범행을 실토 그 죄값으로 4년간의 실형을 선고받고 있었다. 여죄의 자백으로『무거운 형이 더 보태 지겠지만 천주님이 계시는 한 두렵지 않다』는게 청년의 술회다. 그는 사회에 나가면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마음을 갖기위해 미카엘이란 세례명을 갖게됐다는 사연도 밝혔다. ▲문득 골고탑 언덕에 세워진 세 개의 십자가가 떠오른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처형되는 강도 두 사람. 한 사람은 예수의 오른편에 다른 한 사람은 왼편에 매달렸다. 그 중 한 죄수가 예수를 모욕했다. 그러자 흔히 우도로 표현되는 다른 죄수가 그를 꾸짖은 후 자기의 구원을 예수께 요청했다. 우도가 구원을 약속받는데는 예수에 대한「신앙」과『우리가 한 짓을 보아서 어떤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참회」가 전제조건이었음은 물론이다. 여죄를 자백한 청년이 우도같이 중범이 아니라 믿어지지만 우도처럼 신앙과 참회에의해 구원의 길에 들어섰다. 그는 한걸음 나아가 봉사로「속죄」까지 하겠다고 다짐했다. ▲이처럼 복역중인 청년의 회개가 오히려 사회인들을 숙연케하는 일면도 없지않다. 죄수의 회개에 숙연해지는 것은 우리가 양심과 도덕의 부재현상이 날로 심화되는 사회속에 살고있기 때문일 것이다. 양심과 윤리 도덕에 충실한 기업인이나 정치인ㆍ언론인ㆍ교육자가 성공하지 못한다는 사회. 그러면서 아무도 그에 대한 책임감조차 별로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 우리네 풍토가 아닌가. ▲ 그런데 우리는 이 같은 부조리에 대해 거의 전적으로 책임이 있는 듯한 인물들로부터『십자가를 지겠다』는 말들을 흔히 듣는다. 특히 위장 이민이나 외화 도피 부정축재를 자행해 온 걸로 지목되고 있는 이른바 거물급 인사들이 자주 쓰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자기를 버리는 육체와 욕심을 함께 못박는 그런 십자가가 아닌가. 따라서『지겠다』는 그 십자가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님은 분명하다. 우도의 십자가 역시 어울리지 않는것 같다. 당치도 않는 말장난으로 그리스도를 다시 못박아 그를 욕되게 하는 일이 없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