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소년」이란 잡지가 네 차례 나왔다. 1908년에 육당 최남선 선생이 내셨고 1937년에 조선일보사 출판부에서 내가 맡아 꾸며 냈었고 8ㆍ15 해방뒤인 1947년에 문화당에서 냈고 요사이는「가톨릭 소년」이「소년」이 되어 나오고 있다.
나는「소년」을 햇수로 3년 맡아보다가「꾸미고 나서」에 다음과 같은 한마디를 남기고는 사회생활 10년만에 처자를 거느리고 현해탄을 건너가 학창생활을 다시 계속하였다.
「물마른 우물은 메워버리든가 아니면 더 깊이 파든가 해야할 것입니다. 드립다 퍼쓰기만 한 나의 지식우물은 마침내 바닥이 드러나고야 말았습니다. 나는 더 깊이 파기로 마음먹고 배움의 길을 떠납니다」
그러나 내가 일본「도꾜」한복판에서 학생복을 걸치고 대학을 드나들며 터득한 것은 책을 통해서가 아니요 신앙의 문턱에서였다.
내가 다니던 신문사에서 신문학을 배워오라고 학비를 대준 것이었는데, 그런 학문을 가르치는 곳이 바로 예수회에서 경영하는 소피아(上智)대학이었다. 호이베르스 학장신부를 비롯하여 이름있는 독일신부 학자들이 강의를 맡고 있었는데 학교안에 수도원과 성당이 있어서 운동장에서 쉬는 시간조차 나에게는 묵상의 시간이었다.
학교 근처에 살림집을 세내들고 보니 몇 집 걸러 작은 데레사에게 바친「고오지마찌 성당」이 있었고, 그 골목을 빠져나가면, 가톨릭 계통의「후다바」여학교가 나타나 집에서나, 길에서나, 학교에서나 가톨릭 분위기에 젖어 살게 되었다. 학생의 몸으로 벨기에 태생 고라르 신부를 도와「빛」(나중에「성가정」이라 고침) 편집에 한몫 끼었었고, 그분이 자기방에 차려놓은 한글 활판소에서 활자를 하나 하나 뽑아 나의 넷째동요집인「어깨동무」를 1천부 한정판으로 박아낸 것은 1940년 여름이었다. 그 책 꼬리말에서 박목월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후의 창작태도, 그것은 성녀 데레사에게 바치노라 한「산에 사는 나」나「이슬」이나, 「집보는 아기와 눈」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종교적인 경건한 마음으로 맑은 자연을 읊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
「어깨동무」시절 작은 데레사에게 바친 동요 가운데 하나인「집보는 아기와 눈」을 보자.
아기가 집을 보다
잠이 들었다.
지붕에
마당에
장독대에
눈이 내려와 쌓이며
소근 소근 말했다.
「아가 아가,
집은 내 봐 주마」
저벅
저벅
저벅
도둑이 왔다가 눈 위에 난
발자국이 무서워 도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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