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들어 1월부터 6월 사이에 학교성적을 비관, 자살한 중ㆍ고생이 16명이나 속출했다는 보도는 일대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자녀를 잃은 가정은 슬픔에 몸부림쳤고 불행을 겪지 않은 가정은 살얼음 위를 걷듯 불안ㆍ초조하면서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충격파가 일고난 후 사회일각에서는 뜻 있는 사람들이 좌담회나 강연회 등을 열어 그 같은 불행의 원인을 지적하고 시정의 방향을 제시해봤지만 실효는 없는 듯 했다. 행정부에 대항할만한 조직의 힘이 부족한 탓도 있었겠지만.
여하튼 그런 와중에서 대한교육연합회가 중ㆍ고생들의 보충수업 및 자율학습폐지를 문교부에 건의하게 되었고 우리교회 내에서는 대구대교구소속사제 46명의 발기로 자율학습폐지 서명운동이 시작돼 전국적으로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조직의 힘에 굴복한 것인지, 아니면 진정으로 문제점을 인식해서인지는 몰라도 문교부는 현행 보충수업 및 자율학습을 시ㆍ도 교육감의 재량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위임했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보충수업이나 자율학습이 말썽이 있는 곳은 폐지하고 문제가 없는 지역은 계속하도록 함으로써 시끄러운 일이 없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 과연 지역의 말썽여부에 따라 보충수업이나 자율학습을 폐지 또는 계속하는 것으로 현재의 중ㆍ고교학습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을까?
보충수업이나 자율학습은 빈ㆍ부간의 격차를 심화시키는 과열과외를 금지한 대안(代案)으로나 온 줄로 알고 있다. 그 취지나 학생들에게 더 많은 공부를 균등히 시키려는 의도는 이해가 간다.
문제는 그로인해 파생되는 부작용이 너무나 심각하고 엄청나기 때문에 학생 본인들과 그 가정 나아가 이 사회와 국가의 장래를 염려해서 잘못된 교육환경을 바꾸어야 한다는 소리가 나온 줄 안다.
요즘 중3이나 고2ㆍ3년생들의 생활을 보면 마치 공부하기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공부가 인생의 목표인 듯한 인상을 느낄 때가 많다.
하루 4~5시간 잠자고 밥 먹고 학교오가는 시간외에는 오로지 공부에만 집중돼있다. 늘 공부 때문에 긴장되고 불안과 초 조심을 버리지 못한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쳐있어 얼굴은 밝지 못 하고 피부색도 윤기가 나질 않는다.
이들에게 가정은 숙식을 제공하는 하숙집처럼 느껴진다. 부모나 가족 간의 대화나 친교의 시간은 생각조차 어렵다.
신자 학생들이면 토요일이나 일요일의 교리반 출석은 아예 상상도 할 수 없고 주일미사만 참례하면 감사히 생각하는 처지가 되었다. 한마디로 입시를 겨냥한 학교교육이 과대 팽창함으로써 가정이나 사회교육은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상실될 위기에 처해있는 현실이다. 이런 현실은 학생들에게 지적수준이나 사고력을 향상시켜 일류대학은 진학시킬지 모르지만 지(知)ㆍ덕(德)ㆍ체(體)를 겸비한 올바른 인간을 양성할 수는 없다는 것이 뜻있는 이들의 걱정이다.
얼마 전 모(某)재벌이 건립, 한 수녀회에 운영을 위임한 중ㆍ고교의 교장수녀가 교장직을 사임한 사건이 있었다.
그 이유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소위 결정적인 이유는 그 학교에서 일류대학에 학생을 합격시키지 못했다는 얘기다.
교장수녀의「인간교육론」과 재벌 측의「점수교육론」이 팽팽히 맞서 결국 사표를 던진 것으로 알려졌었다.
다 아는 사실이지만 교육의 본래 의미는 인간의 가치를 높이고자 하는데 있다. 인간이 본래 지니고 있는 여러 소질이나 특성을 다양하게 계발시켜 인간다운 인간으로 성장시키는데 있다. 여기에는 학교교육이 중요하긴 하지만 한 부분을 차지할 뿐이다. 결코 학교 학교교육이 전부일 수는 없다.
그런데도 현실은 어떠한가? 학생도 교사도 부모도 공부에만 매달려 있지 않는가? 모두가 「공부」때문에 희생을 강요당하고 긴장되고 불안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자살한 어느 여중생이 친구에게 남긴 유서에『공부만 해서 행복한 거 아니잖아? 무엇이든지 최선을 다해 이사회에 봉사하고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위해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면 그것이 보람 있고 행복한 거잖아?』하는 외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현행의 획일화된 교육제도나 법, 극성스런 부모의 보상 심리적 과잉욕구나 학교간의 치열한 경쟁의식 등이 무죄한 학생들을 희생시키고 죽음으로까지 몰아간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어른들이 짜놓은 틀과 그물에 걸려 어린 학생들이 밝고 맑게 자라지 못하고 아픔과 괴로움 속에 허우적거린다면 어디에 희망이 있는가? 그런 속에서 겨레와 민족의 앞날을 기약할 수 있을까?
오늘의 중ㆍ고교 교육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곧 어른들에게 문제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문제가 있다면 개선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책임전가나 기회주의적 행동은 결국은 인간을 죽이고 망국을 자초할 뿐이다.
학생을「점수 따는 기능인」으로 만들지 않고 「사람다운 사람」으로 키울 때 밝은 내일이 가능할 것이다. 여기에는 여야나 관ㆍ민의 구별이 있을 수 없음을 명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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