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다 대광주리에 대추가 쪼그라지게 말려지고 있다. 달디 단 당분이 농축되어 몸체는 점점 작아지고 그의 자리는 점점 더 넓은 공간을 마련한다.
이 대추의 내력을 말하자면 추석 20여일 후 시어머님 생신이어서 어머님이 계시는 온양 큰댁에 갔다.
마당에는 대추나무가 있고 그것은 때가 다 되어 거두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올려다보니 무너져 내릴 듯 주렁주렁 다닥다닥 무수히 달려 있었다. 추석에 왔을 때는 꼭지 부분만 겨우 붉었는데 그새 완전히 잘 익은 대추 색 그대로였다.
이른 여름철이었던가 결코 드러나지 않는 보일 듯 말듯 한 작은 꽃들을 피웠고 그 동안 햇빛과 바람을 동무하며 은근히 생장하더니 드디어 자기완성을 이루고 나 여기 있다고 손짓하며 부르는 듯하다.
알 수 없는 환희와 흥분이 솟구쳤다. 마당에 비닐 깔개를 온통 펴서 깔아놓고 아저씨와 사내아이는 장대로 대추나무를 휘달겨 댔다.
우두둑 딱 툭 우박처럼 쏟아져 내린다. 아래에서 주워 담는 나의 머리와 어깨 등을 마구 때렸지만 묘한 쾌감마저 느꼈다. 큰 것은 알밤만하고 작은 것은 버찌만한 것도 있었다. 잘 생기고 못 생긴 것이 있다. 어쩌다 잎새 뒤에서 별을 못 봐서 아직도 파랗게 설익은 것도 있다. 한 나무 열매지만 각양각색이다. 담 밖에는 아이들이 많이 모여와서 구경하고 있었는데 갖고 싶어 하는 마음이 역력했다. 밖에도 제법 떨어졌는데 아이들이 각자 주워갖기로 했다. 거저 받은 은혜를 몽땅 차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수확한 것을 모아보니 큰되로 말가웃(한 말반)은 넉근히 돼보였다.
오늘 일은 도시에 살던 나에게는 경이로움이었고 크신 그분께 한발 짝 더 가까이 가게 하는 겸허를 갖게 했다. 동서와 함께 제사에 쓸 크고 잘 생긴 것을 따로 골랐다.
그리고 큰 엄마는 오늘 왔던 친척들에게 한 두 되씩 고루 나누어 주는 자상함을 잊지 않았다. 열매를 다 떨고 난 나무는 오히려 홀가분하고 시원해 보이기까지 하다. 저 나무는 이제 그 할일을 다 하고 홀로 누구의 보호를 받지 않으며 스스로 강한 가시를 내어 자신을 지키게 된다.
문득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이 난다. 시골집 근처에 가면 벌써 아버님 기운이 돌고 있었는데 가끔씩 나는 큰기침 소리와 거의 끊이지 않고 나는 라디오 소리다. 뭔가 배우려고, 아시려고 라디오 소리에 경청 하셨고 항상 종이에는 무언가 쓰고 계셨다.
기억해야 할 일, 해야 할 일을 달력과 담배 값 종이에까지 쓰셨다. 냉정한듯하면서 자상하셨다. 남이 보기엔 남다르지 않은 수수한 촌로이셨지만 무지하지도 무계획 하지도 무질서하지도 않은 절도있는 삶을 사셨다. 안계시니 별로 내색하지 않았던 그 정의 깊이를 더욱 달 것 같다.
시골집엔 지금 서울 서 살던 노인 내외가 살면서 집을 지켜주고 있다. 새댁 때 그렇게 을씨년스럽고 낯설고 했던 그 집이 지금은 왜 이렇게 그립고 가고 싶은지 그리고 왁자지껄하며 부산하게 돌아가던 그 많은 날들이 어른거리며 무상함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무엇엔가 길들여지고 이해하는 마음이 될 때 그때는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이 너무 짧음을 보게 된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과 얘기하고 나의둘레 모든 것에 눈을 뜨고 관찰해야 한다. 그리고 빨리 깨달아야 할 것이다.
저 베란다의 대추는 날로 쪼들고 수척해지지만 사람을 위해서 보약이 되어준다. 인삼과 함께 다려 먹으며 내 귀중한 인생을 위해서 튼튼해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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